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등반사진/경상북도의 산

청송 주왕산(721m) : 2015. 12. 27 청기와회

딜라일라 2017. 12. 26. 23:01


청기와 연말모임을 1박2일로 청송에서 가졌다

전날 술을 적지않게 마셨지만 나와 신형화, 구근회 3명은 둘째날 아침 일찍 일어나 주왕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주왕산은 이번까지 총 4번째 오르는 것 같다

주왕산의 주왕은 주원왕으로 불린 김주원에게서 시작된다.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 7세손으로 선덕왕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추대되었지만 즉위 날 쏟아진 폭우로 입궁을 못 하게 되자,
 이때를 틈타 정적이었던 김경신(내물왕 12세손)이 무력으로 위협해 왕위에 올랐다.
결국 김주원은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지금의 강릉)로 물러나야 했다.
김주원은 단순한 지방 세력가가 아닌, 새로운 나라를 꿈꾸면서

‘명주군국(溟州郡國)’이라는 독자적인 나라 이름을 짓고 통치조직과 군사기반을 다졌다.

당시 신라는 지배층의 부패가 극에 달했고. 백성들은 당나라로 구걸하러 가고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김주원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인 김헌창은 전라·충청 지역을 돌며 지방관을 맡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민심을 눈으로 확인하고
신라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장안(長安)’이라 나라 이름을 짓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헌창의 난은 순식간에 절반 가까운 지방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군의 일사불란한 진압과 밀고자로 크게 패해, 결국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왕산 전설은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수제자로, 반란이 실패하자 수도승이 된

낭공대사가 920년에 쓴 <주왕사적>이라는 비밀기록에서 드러난 것인데,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실패한 혁명의 역사를 중국 이야기로 꾸몄다는 것이다.

낭공대사는 이 기록을 자신이 죽으면 땅에 묻어두었다가 100년이 지난 후 열어 보라고 했다.

주왕산은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 3대에 이르는 반란의 한이 맺힌 산인 셈이다. <조선일보 산에서 펌>

 



7:05   대전사 경내에서 미명속에 산행을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라 매표소에 표 받는 사람이 없겠지 했는데 떡 버티고 서 있다
지난번에 왔을때는 8시에 직원이 출근하면서 받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각에 우리가 걸려 입장료를 냈는데
오늘은 7시인데도 있어 물어보니 5시30분부터 대기하고 있단다
국립공원 직원들의 철저한 직업정신(?)에 혀를 내 두를 수 밖에 .....
  



7:40   전망대

해는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 주변 풍광을 감상하기에는 이르다



8:15   주왕산 정상 주봉 도착 (산행시간 : 1시간 10분)
2010년 2월에는 '주왕산' 이라고 적힌 정상석이었는데  그세 정상석이 바뀌어 있다


아침 햇살이 주변을 점차 밝게 비추고 있어 사진발도 받기 시작한다


<참고사진 : 2010년 2월의 정상석>





9:00   후리메기 삼거리

후리메기란 주왕의 군사가 훈련하던 장소라하여 훈련목으로 불리다라 후리메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절골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가메봉을 지나 이곳으로 하산을 할수 있다


예전에는 주왕산의 폭포들을 1,2,3폭포로 불렀었는데 그것들은 일제시대 강제로 부여한 이름들이었고
옛 문헌들을 뒤적여 되찾은 지금의 이름들인 용추(1),절구(2),용연(3)폭포로 2013년부터 바꾸어 부른다고 한다


9:20   용연폭포 
예전의 제3폭포인 용연폭포는 주왕산의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단보다 1단이 더 아름답다
 


용연폭포의 위 쪽 1단부
폭포 왼쪽 폭포의 단애면에 3개의 하식동이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용연폭포 1단 바로 위에는 삼거리가 있는데

이 삼거리는 절골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가메봉 삼거리에서 가메봉을 거쳐 후리메기 삼거리로 빠지거나

아니면 게속 직진하여 오지마을로 이름이 알려졌던 내원마을을 거쳐 이곳 삼거리에서 합류하게 되며,

또 내원사에서 장군봉을 금은광이 코스로 올랐을 때 이곳으로 하산을 하게되는 포인터이다

신형화와는  다음번에는 장군봉-금은광이 코스를 오르기로 약속하였다

 

용연폭포의 아래, 위가 다 보이는 곳에서 한 컷을 찍었는데

겨울이 아니면 나무숲에 가려져 이 광경을 볼수가 없다

 


9:35   제2폭포인 절구폭포

이 절구폭포도 2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9:55   제1폭포인 용추폭포



이제 길은 깎아지른 암봉과 신비로운 기암괴석, 그리고 웅장한 폭포들이 어우러진

협곡으로 들어서는데 그 절경에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깎아지른 절벽위에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는 학소대





10:00   시루봉
 


학소교 아래 시루봉에서 주왕굴로 가는 바위 암봉인 망월대에는 전망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잘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망월대 전망데크에서 건너다 보이는 연화봉 전경



그리고, 왼쪽의 병풍바위와 오른쪽의 급수대도 보인다


급수대는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했다는 곳이다

 


저기 보이는 주왕암 안쪽에 주왕굴이 숨어 있다

 

뒤로 촛대봉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주왕암
주왕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암자이다
  저 촛대봉 위에서는 숨어 있는 주왕굴이 잘 보이는지 저 촛대봉 위에서
신라장수 마일성이 활을 쏘아 주왕을 죽였다고 한다



계곡 바위 암봉사이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숨어 있는 주왕굴로 가는 긴 계단
이 계단이 없이 옛날에는 어떻게 올가 갔을까?
  

10:25   주왕굴
주왕이 최후를 마쳤다는 곳이다

깊이 2m의 굴 속에 탱화와 산신상이 모셔져 있다
 

주왕굴을 내려오면서 보니 저 앞쪽의 암봉위에서는 주왕굴이 내려다 보일수 있겠다 싶다


10:35   무장굴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을 하며 무기를 숨겨 두었다는 곳으로 약 6m길이의 굴이다
 




아들바위


11:05   대전사 (총 산행시간 : 4시간)
다시 되돌아 온 대전사에서 우뚝 높이 서 있는 기암(旗巖)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신라의 토벌대가 나서자 주왕은 이 암봉에 볏짚을 씌워 노적가리인 양 현혹시켰으나
후에 바위임이 탄로나 일시에 격퇴됐다
이에 신라의 마장군이 이 암봉에 大將旗를 꽂아 旗岩이라고 불리는데,
 원래 하나의 암체였으나 수직으로 발달된 주상절리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지금은 7개의 암봉으로 분리돼 있다






대전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때 나옹화상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명복을 빌기위해

절 이름을 바꿔 대전사라고 명영했다고 한다







한약재를 섞어 만든 동동주가  부드러우면서 깊은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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