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등반사진/경상북도의 산

청송 주왕산(722m) : 2010. 2. 21 신형화와 둘이서

딜라일라 2017. 12. 14. 01:08



주왕산 산행은 2006. 7월 이후 이번이 세번째 산행이다

 

대전사

(신라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때 나옹화상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명복을 빌기위해

절 이름을 바꿔 대전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보광전 뒤로 보이는 기암(旗岩)의 웅장한 자태 : 생긴 모습이 뫼 산(山)자 그대로이다


당나라 때 '후주천왕'을 자처하며 군사를 일으킨 '주도(周鍍)'라는 자가 반란이 실패하자 멀리 이곳 석병산으로 피신했고,

 당이 신라에 '주왕(후주천왕)'이라 자처하는 주도를 잡아달라고 요청하자 신라는 마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켰다

그 뒤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 이름을 주왕산으로 하면 고장이 복될 것이라고 하여 

산이름이 石屛山에서 周王山으로 바뀌었다는 전설로 전해 오는데

사실은 신라 때 일어난 실패한 혁명의 역사를 어쩔수 없이 중국 이야기로 꾸몄다는 것이다


주왕산의 주왕은 주원왕으로 불린 김주원에게서 시작된다.

김주원은 신라 태종무열왕 7세손으로 선덕왕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추대되었지만 즉위 날 쏟아진 폭우로 입궁을 못 하게 되자,

 이때를 틈타 정적이었던 김경신(내물왕 12세손)이 무력으로 위협해 왕위에 올랐다.

결국 김주원은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지금의 강릉)로 물러나야 했다.

김주원은 단순한 지방 세력가가 아닌, 새로운 나라를 꿈꾸면서

‘명주군국(溟州郡國)’이라는 독자적인 나라 이름을 짓고 통치조직과 군사기반을 다졌다.

당시 신라는 지배층의 부패가 극에 달했고. 백성들은 당나라로 구걸하러 가고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김주원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인 김헌창은 전라·충청 지역을 돌며 지방관을 맡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민심을 눈으로 확인하고

신라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장안(長安)’이라 나라 이름을 짓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헌창의 난은 순식간에 절반 가까운 지방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군의 일사불란한 진압과 밀고자로 크게 패해, 결국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왕산 전설은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수제자로, 반란이 실패하자 수도승이 된

낭공대사가 920년에 쓴 <주왕사적>이라는 비밀기록에서 드러난 것인데,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실패한 혁명의 역사를 중국 이야기로 꾸몄다는 것이다.

낭공대사는 이 기록을 자신이 죽으면 땅에 묻어두었다가 100년이 지난 후 열어 보라고 했다.

주왕산은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 3대에 이르는 반란의 한이 맺힌 산인 셈이다. <조선일보 산에서 펌>


신라의 토벌대가 나서자 주왕은 이 암봉에 볏짚을 씌워 노적가리인 양 현혹시켰으나
후에 바위임이 탄로나 일시에 격퇴됐다
이에 신라의 마장군이 이 암봉에 大將旗를 꽂아 旗岩이라고 불리는데,
 원래 하나의 암체였으나 수직으로 발달된 주상절리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지금은 7개의 암봉으로 분리돼 있다


8:50  산행시작
(대전사 경내를 가로질러 부도탑을 지나면 나타나는 두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등로를 따라 오른다)
  

바람 한 점 없는 춥지않은 날씨였으나 며칠전 내린 눈은 아직도 많이 쌓여잇다
 

산행 중 만나는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기암의 또다른 모습




주왕산은 주방천 협곡 양사면으로 봉우리가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데

정상쪽은 육산에 가깝다면 건너편은 온통 기암괴석의 연속이다

 

9:45  주왕산 정상 도착 (소요시간 : 55분)

 

나무숲에 가려 주위 조망은 좋지 못하다

 

주왕산은 이곳보다 가메봉(883m)이 더 높으나, 대전사 터의 맥이 닿고있기 때문에

이곳을 정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0:05  칼등고개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눈길산행은 상쾌 그 자체였다

 




10:30  후리메기 삼거리


10:45  후리메기 입구

(사실상의 산길은 여기서 끝나고 이제부터는 주왕산 명소탐방이 시작된다)

 

10:50  제3폭포



주왕산 세개의 폭포 중 가장 웅장하다

 


11:00  제2폭포


제2폭포는 후리메기쪽 사창골에서 내려오는 폭포로서

2단으로 되어있으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움푹 패인곳에 한번 쉬었다가 다시 떨어진다

 




11:10  제1폭포 (일명 : 선녀폭포)

(규모는 다른 폭포에 비해 작지만 비좁은 바위절벽 사이를 쇠난간을 따라 걷는  주변이 압권이다)


깎아지른 절벽위에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는 학소대

 



시루봉


 급수대
급수대는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사용했다는 곳인데
신라의 왕손이 대궐을 지었던 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망월대 (전망대)


이 곳 망월대에 올라서면 건너편의 절경들이 코앞에 보인다
 

연화봉
 

병풍바위
 


급수대
 




11:30  주왕암


주왕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암자이다
 

주왕암 뒤로 높이 솟아있는 촛대봉
 



주왕이 최후를 맞았다는 주왕굴
깊이 2m의 굴 속에 탱화와 산신상이 모셔져 있다




 11:40  무장굴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을 하며 무기를 숨겨 두었다는 곳으로 약 6m길이의 굴이다

 


자하성의 흔적들
 

달기약수 원탕(하탕)
(상탕, 중탕, 하탕, 신탕, 옥탕, 천탕, 장수탕 등 10여개의 약수터가 있다)

달기라는 이름은 약수터의 위치가 청송군 부내면 달기동(疸基洞)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일설에는 은나라 주왕의 애첩인 달기()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청송 주왕산(周王山)의 옛 이름은 석병산(石屛山)이었는데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당나라에서 반정을 하다가 실패하여 석병산에 와서 은둔하였고

그 뒤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 이름을 주왕산으로 하면 고장이 복될 것이라고 하여 주왕산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달기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애첩으로 나라 이름(東晉과 殷나라)과 사람이름(周鍍와 紂王)이 다르다


일반 온천수보다 알칼리 성분이 많아 피부미용에도 좋고
 관절과 관련된 질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하는 주왕산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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