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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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죽도왜성 : 2024. 7. 28.

딜라일라 2024. 7. 29. 22:57

 

지난 7월 4일 구포왜성(龜浦倭城) 답사에 이어 

구포왜성의 본성(本城)인 김해 죽도왜성(竹島倭城)을 찾아 나섰다

 

 

임진왜란 당시 죽림동 일대는 낙동강 하구로 죽도(竹島)를 제외하고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넓은 황무지였다

죽도는 김해 육지로부터 공격하는 조선군(朝鮮軍)을 막거나 공격하고

선박을 정박시켜 후퇴에 용이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부산근교의 왜성으로는

이 김해 죽도왜성의 규모가 가장 컸으며, 구포왜성은 죽도왜성의 지성으로 쌓은 것이고

강을 따라 북쪽으로 쌓은 호포왜성(湖浦倭城)과 증산왜성(甑山倭城)도 죽도왜성과 연계되어 있다

죽도왜성은 주변의 구포왜성, 양산왜성(증산왜성)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

김해 북쪽지역에서 내려오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과 바다를 이용해 배로 다른 왜성들과 긴밀한 연락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호포왜성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35번 국도와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으로

철저하게 훼손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로 되어 있으며

증산왜성(양산왜성)은 일부 흔적이 남아 있으나 유지,보수의 흔적없이 방치되어 있다

 

오늘 답사한 죽도왜성도 옛날의 화려했던 위세와는 달리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흔적을 겨우 찾을수 있을 정도였다

 

 

구포역 앞에서 강서7-2번 마을버스를 타고

부산소프트웨어마이스트고등학교 앞에서 내려 북쪽으로 900m 정도 이동하면

가락동행정복지센터가 있는 동네에 가락농협과 가락파출소가 있고

(구포역에서 강서6번 마을버스를 타고 가락동행정복지센터 정류장에서 하차해도 되는데

두 버스노선 모두 배차간격이 약1시간에  1대 꼴이다)

 

 

가락농협 하나로마트와 

 

 

SK주유소 사이에

 

 

죽도왜성으로 가는 길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는 죽도왜성 안내는 보이지 않고  가락 국가관리묘역 안내판이 서 있다

 

 

시멘트길 오르막을 따라 가다가 오른쪽의 가락 국가관리묘역으로 먼저 가 본다

 

 

 

그곳은 한국전쟁 때 산화한 이 고장 출신 호국영령들을 모신 곳이었다

 

 

 

2022년에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된 묘역은 한창 새 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이 고장 출신 39명의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잠시 묵념을 올리고 .....

 

 

오르막 길을 따라 문수암 쪽으로 계속 오른다

 

 

문수암 이정표와 함께 죽림동 죽도왜성 안내판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왜장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鳥直茂 1538~1618)

서낙동강 수로 확보와 조선군의 내습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 양쪽에 축조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진영의 넓이가 평양 정도나 되었으며  3면이 강에 접해 있고

그 규모가 1만여 명의 군사를 수용할 만하였으며

높고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서쪽으로 신답왜성과 마사왜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다고 적혀 있는데

신답왜성과 마사왜성은 검색을 하여도 나오지도 않는다

 

죽도성의 지성(支城)생림면 마사왜성(馬沙倭城)구포왜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 측에는 인근의 주촌면 신답왜성(新畓倭城)김해 부읍성이 지성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많은 조선 도공을 일본으로 끌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조선 도공들의 기술을 가지고 시작한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가

훗날(18세기) 세계적 명품 도자기로 올라서게 되는 그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문수암이 먼저 나온다

 

 

문수암에서 낙동강쪽을 바라보니 이곳에 왜성이 축조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서낙동강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고 멀리 김해의 신어산과 대동의 백두산

부산의 금정산까지 빠짐없이 조망이 된다

 

 

문수암(文殊庵)

문수암 옆으로 죽도왜성으로 가는 길과 이정표가 보인다

현재 죽도왜성의 중심부 대부분은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일부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일본 왜성에서 천수각은 우리나라의 장대(將臺)와 같은 곳으로

왜성에서 상징적인 건물이며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평소에는 왜장이 머물고 전쟁 때는 전쟁을 지휘하던 곳이다

지금의 죽도왜성에서 천수각의 흔적은 없지만  문수암이 있는 자리가 천수각이 있던 곳으로 추정을 한다

 

 

문수암 대웅전

산마루 김복현 님의 기록에 의하면  2016년 7월 답사 때 한창 대웅전 불사가 진행 중이었다고 하니

2016년 이후에 지어진 전각이다

 

 

산신각

 

 

무성한 잡초로 뒤덮혀 있는 폐허의 죽도왜성

김해 죽도왜성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823번지의 김해평야 가락산(오봉산) /47.5m)정상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성으로 오봉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중심부가 축조되어 있으며

가락초등학교의 서쪽으로는 외곽부가 잔존해 있다고 한다

 

 

199939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 김해 죽도왜성으로 지정되었다지만

관리가 전혀 되지않고, 무성한 잡초로 뒤덮혀 있어 성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북쪽 언저리에 겨우 남아 있는 축성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김해 죽도왜성의 성벽은 대부분 장방형의 깬돌로 쌓았는데

석재는 부근에서 구하기가 어려워 먼 곳에서 육로 및 뱃길을 이용하여 운반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왜성의 성벽은 면석과 면석 사이의 빈틈에 잔돌을 끼워 가며 줄눈 흐트려 쌓기 하는 것이 기본이나

죽도성의 성벽에서는 잔돌 끼움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성 한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자연석을 일부러 모아 둘러 놓은 것 같은데

 

 

한 쪽 면에 한자와 한글로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문수암이 내려다 보이는 한 쪽 언덕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돌기둥이 서 있다

저 문수암이 있는 자리가 왜장이 머물면서  전쟁을 지휘하던 천수각이 있던 곳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성터의 한쪽은 밭으로 개간된 농장이 들어서 있고

 

 

농장 앞의 임도를 따라 조금 내려가 보니 현판이 없는 조그만 사찰이 나오는데

지도상의 보현사인듯 하다

 

 

보현사 앞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김해평야

이 보현사가 있는 자리도 옛 죽도왜성이었을 터이니 죽도왜성은 평야 한 가운데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시야가 훤하게 틔여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기 더할나위 없이 좋았을 것 같아 보인다

 

임진왜란은 후진국 일본이 선진국 조선을 약탈하기 위해서 사전 치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3만여 명의 특수부대를 따로 편성하였고

여기에는 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금속부, 보물부, ()부 등 6개 부서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각종 문화재나 서적, 예술품, 진기품, 도공, 젊은 남녀, 가축 등을 약탈, 수집, 납치하는 전담 조직이었다

약탈품 감별을 위해 문화적 안목이 있는 교토 5산의 학승(學僧)들도 자문역으로 배속되어 있었으니

도자기의 경우는 조선 8도 어디에 유명한 가마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왔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도공 납치 특명을 받은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鳥直茂 1538~1618)가

이 김해 죽도왜성에 포진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대목이다  

 

 

강동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죽도왜성을 품고 있는  오봉산 모습

강동교 끝에는 오리고기로 유명한  오래된 식당 '낙동강오리알'이 있다

 

저 죽도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도공들이 붙들려 있던 곳이기도 하다

죽도왜성에서 아리타 지역으로 끌려간 도공 중에 이삼평(李參平)과 백파선(百婆仙)이 있었는데

바로 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이며 그 부흥의 초석을 놓은 조선인들이다

16세기 초 조선인들이 뿌린 도자기 씨앗은 그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유럽 최고 명품 도자기로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6세기 일본은 사회 전반에 다도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주 진중에서 무장들과 다회를 즐기고 다고 스승까지 두었다고 하니

자연히 다기(茶器)는 수요가 높았고 선망의 고가 수입품이었다

선진국 조선에 상륙한 왜군들 눈에는 조선의 모든 물산이 진기했으며

명주, 모시, 종이, 필묵 등 모든 것이 귀해 가져가면 돈 안되는 것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지천인 광목도 그들에겐 쉽게 접하지 못하는 물건이었으니 사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일본 서민은 토기나 목기에 밥과 국을 담아 먹었고 제후라도 칠기를 쓰면 괜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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