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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신기리 지석묘 -호계리 마애여래좌상 -무아의 집(범실공소 터) : 2022. 8. 25

딜라일라 2022. 8. 25. 23:46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 447-1 (베데스다 복음병원 인근)

 

 

양산 신기리 지석묘 (梁山 新基里 支石墓)

 

 

지석묘(支石墓)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支石)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上石)을 올려 놓은 탁자식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데

신기리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일반적인 남방식지석묘로 일반적인 바둑판식에 해당한다

 

 

덮개돌은 길이 2.4m, 너비 1.55m이고

고인돌의 하부구조는 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다른 지역의 지석묘 하부구조처럼 지하에 무덤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신기리마을 주변에도 이 같은 지석묘가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후대의 민가축조, 도로개통 등으로 모두 파괴되고 겨우 이곳의 1기만 남았다고 한다

 

 

<참고사진> 

언양읍 서부리에 위치한 울산시기념물 제2호인 이 고인돌은

길이 8.5m 너비 5.3m로 영남지역 최대 규모의 지석묘인데

옛부터 서부리 주민들은 '용바우'로 부르며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신기리 지석묘를 떠나 차를 몰고 호계리 마애불을 답사하러 간다

양산 호계리(虎溪里) 마애불이 있는 양산 산막동(山幕洞)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산막마을은 천성산 기슭의 산골마을로, 이 마을 남쪽 산등성이를 넘으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던 반고굴이 있다

원효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가자 요석공주가 그를 사모하게 되었지만

원효는 불도를 닦고 중생을 보살피는 데만 전력했을 뿐 공주의 애타는 호소를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원효가 다리를 지날 때

누군가 원효를 물속에 밀어 넣어 옷을 젖게 한 다음, 공주의 방으로 데려가 쉬어가게 했다

그날 밤의 인연으로 생긴 아이가 신라의 위대한 학자 설총이다

다음날 원효는 홀연히 궁을 빠져 나와 수도와 진리 탐구를 위해 반고굴로 갔다

무소식에 애가 탄 요석공주가 설총을 안고 와서 산에 막을 치고 원효를 만나고자 했으므로 이곳을 산막동이라 한다

 

 

반고굴 마애불 입구

나중에 알고보니 마애불까지도 차를 가지고 올라갈 수가 있었으나

운동도 할 겸, 산사로 들어가는 호젓한 산길의 운취를 맛보고저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기로 한다

 

 

반고굴사(磻高窟寺)  / 여늬 법당과는 달리 창고같은 건물이다

처음엔 이곳이 석굴암인가 했더니 아닌 것 같고

 

 

석굴암과 마애불은 600m 더 올라가야 한다

 

 

석굴암(石窟庵)

 

 

굴(窟)은 아닌데 산 기슭의 자연석을 벽으로 활용하여 법당을 지었다고 석굴암이라 하는 모양이다

 

 

여기도 .....

 

 

마애불을 모신 전각

양산시 호계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로,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양산 호계리(虎溪里)  마애불(磨崖佛) 

양산 호계리 월전마을 뒤 산중턱에 있는 큰 바위의 남쪽면에 새긴 것으로 불상 높이 220㎝, 대좌 높이 320㎝이다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으로서 얼굴은 양각(陽刻)하고 각 부분의 윤곽과 옷주름은 선각(線刻)하였다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갔으며, 오른손과 무릎 그리고 발 역시 심하게 마모되어 세부는 명확히 알아보기 어렵다

 

 

머리는 마애불로는 드물게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나

앞쪽으로 두 줄 정도만 남아 있고 그 위로는 마모되어 나발의 표현이 희미하다.

그리고, 마치 두건을 쓴 듯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불분명하다

몸에 비해 큰 얼굴은 사각이고 길게 감은 눈, 어깨까지 처진 귀, 큰 코, 굳게 다문 입 등이 특징으로 투박한 인상을 준다

광배(光背)는 타원에 가까운 모양으로 희미하게 선만 남아 있다

 

 

양쪽 어깨에 걸쳐 있는 법의는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으로 형식화되었다

왼손은 오른쪽 발바닥 위에 얹어 땅을 가리키고 있는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과 오른발 무릎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다

대좌(臺座)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인 연화대좌(蓮花臺座)로 평면형을 선으로 새겼다

 

 

반고굴(磻高窟) 굴법당

마애불 옆의 바위 아래에는 사람 10명 정도가 기거할 만한 동굴이 있는데

온돌을 구축한 흔적이 남아 있어

원효가 젊었을 때 수도하던 반고굴(磻高窟)이라고 전해져 오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반고굴이 있는 이곳은 천성산 기슭으로 천성산의 옛 이름이 원효산이있던 것 만큼

이 산에는 화엄벌을 비롯한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오는 곳이다

 

 

 

반고굴(磻高窟) 문을 열고 굴법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굴법당 내부

온돌을 구축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데 어딘지 잘 모르겠고, 규모는 제법 넓지만 생각보다 시원하지는 않다

 

 

가운데 주불은 청정범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불은 약사여래불, 우불은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용왕님 밑에는 약수도 있는데

 

 

약수가 차갑지를  않아 시원한 청량감은 느낄 수가 없었다

  

 

법당 앞으로 전개되는 조망....  이쪽은 오봉산 쪽 전경이고

 

 

오봉산

 

 

저기는 선암산(어곡산)과 에덴밸리 리조트가 있는 천마산 -능걸산 -뒷삐알산 능선인데

 

 

에덴밸리의 산 능선을 따라 서 있는 풍력발전기가 인상적이다

 

 

줌으로 최대한 당겨 본 선암산(어곡산)의 매바위

그러고보니, 저 매바위를 오른지가 꽤나 오래 되었구나~

 

 

 

마애불을 답사한 뒤 내려가다보면 바로 아래에 있는 '무아의 집'이 있다

 

무아(無我)의 집은 한국 카톨릭 빨마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으로서

자기상실의 삶 대신 사랑으로 채워지는 집이라는 의미이며

여생을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노인 복지시설이다

 

 

한편, 무아의 집은 천주교의 옛 범실공소가 있었던 자리다

 범실은 지금의 호계리(虎溪里)의 옛 명칭이고

공소(公所)란, 본당보다 작아 본당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 또는 천주교 건축물을 말하는데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는 집전되지 못하고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서만 성사가 집행된다

 

 

언양지방 공소(公所)의 역사는

오한우김교희가 함께 서울에서 초기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언양지방에 천주교의 씨가 뿌려진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오한우는 순교하고 김교희는 가정을 이끌고 간월산 불당골로 피신함으로써

영남지방의 첫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후,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0년의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을 거치면서

간월산 불당골은 불태워지고 해체된 뒤

간월공소대재공소(죽림굴)  -안살티(현, 청수골 주변) -사기점(범실공소)를 거쳐

지금의 살티공소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곳 범실공소는 이 과정에서 1840년경 남주견에 의하여 설립이 되었다가 살티공소로 피신하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살티공소는 석남사 입구에서  배내고개로 올라가는 옛길 초입에 있다

 

간월산 불당골(간월골)은 석남사에서 북쪽으로 상운산 귀바위로 오르는 계곡을 불당골이라고도 하던데

살티공소 안내문에 의하면 간월골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로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간월산 왕봉골에는 죽림굴(竹林窟)이라는 천연동굴이 있는데 지금은 천주교 성지로 많은 신자들이 찾는 곳이다

1840년부터 1868년까지 대재공소로 사용되다가 1860년의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신자들은 대거 체포되었고 남은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1868년에 공소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후 오랜 시간 잊혔던 죽림굴은 1986년 부산교구 언양본당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당시 죽림굴 안에서 발견된 구유 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은 언양성당의 신앙 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로서 오늘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한다

다음에는 부산 노포동의 고분군과  양산 신기리와 북정리의 고분을 답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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