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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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노도 김만중 선생 유배지 답사 : 2019. 5. 2.

딜라일라 2019. 5. 3. 07:19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인 남해의 노도를 찾았는데

이효준의 수필집 <나비타고 청산가세>를 다시 읽으면서 책 속에 소개된 노도에 가고 싶어서였다

남해군은 지금 노도를 문학의 섬으로 만들려는 공사를 수년 전부터 하고 있는데 금년중에는 마무리가 된다고 한다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주/미조 행 군내버스를 타고 벽련마을에서 하차를 한다

 오늘이 남해장날(2.7장)이라 장을보고 돌아가는 많은 노인들이 타고 내렸지만 2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리니 저기 바다 건너 노도가 모습을 보인다

노도는 원래 이름이 삿갓섬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이 섬의 나무로 노를 많이 만들었다고 해서 노도(櫓島)로 불리고 있다

  


버스정류장 옆 카페 옆으로 벽련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벽련마을

碧蓮, 말 그대로 짙고 푸른 연꽃, 3천년마다 핀다는 우담바라의 마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저기 저 커다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마을 입구의 식당

마을에는 펜션 하나와 여관 한 곳, 몇몇 민박집 외에 식당은 이 집 말고는 눈에 보이지를 않는데


식당의 홍보 간판이 재미있다



마을 선착장 앞에는 팽나무 한 그루와 느티나무 두 그루의 노거수들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그 옛날 마을 방풍림으로 심었던 나무들을 이제는 사람들이 이 나무들을 보호하고 있다



선착장에서 보이는 바로 앞의 노도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 선생이 3년간 유배 생활을 하던 중 56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저기가 바로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의 산실이다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선착장은 작년 여름 태풍 피해로 보수공사 중이라

건너편 선착장을 이용해야 한다

 

12시가 조금 넘자 정기 도선인 노도호가 들어 온다

노도호는 2013년 8월에 취항하여 하루 네 차례 벽련과 노도 사이를 운항하고 있는데

저 배가 없던 예전에는 어선이나 낚싯배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선착장에서 바라 본 벽련마을

저기 보이는 저 선착장이 보수공사 중인 노도호 전용 선착장이다



완두콩꽃


괴불주머니


12시30분에 벽련선착장을 출발한 노도호는 5분여 걸려 노도에 도착을 한다

배로 불과 5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는 산술적으로 잴 수 없는 하염없는 거리였다

승객은 남해장을 보고 오는 할머니 몇 분과 공사관계자 한두 명 등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노도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먼저 반기는 조형물


서포는 그의 저서들을 모두 한글로 썼는데

조선의 3대 고전문학가라 하면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 서포 김만중인데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사대부 층에 있으면서 한글로 작품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선착장에는 노도 마을회관과  노도항 대합실이 있고, 마을은 조금 더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회관 옆의 유허비



유적지로 가는 길은 노도항 대합실 바로 옆으로 올라가도 되고

그 옆의 완만한 길로 가도 된다




마을 초입의 무더위쉼터와 팽나무 고목



그 옆의 옛 분교터에는 지금 공사현장 사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공사가 모두 끝나면 노도민속체험관으로 사용 할 것이라고 한다


유허지로 가는 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전경

2013년 9월 당시엔 13가구 1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는데

오늘 섬으로 들어오면서 배 안의 주민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11가구만 살고있다고 한다

 

공사가 아직 한창인 듯 공사자재를 실은 트럭이 오가는 길은

배관공사 후 포장도 아직 마무리가 되질 않았다



제비꽃


괭이밥(시금초)


살갈퀴


갈림길

왼쪽 아래길은 초옥터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윗길은 허묘터로 가는 길인데

먼저 허묘터로 간다




여기에서는 오른쪽 계단길로 간다

(평탄한 길은 상수도시설 집수탱크로 가는 길이다)

 

계단을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서포가 허구한 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바라보았을 뭍의 풍경이 펼쳐 진다

바다 건너 오른쪽의 조그만 산은 천황산인데, 그 뒤로 보이는 큰 산은 금산인지 확실하지 않다


줌으로 당겨 본 산 정상

금산의 상사바위를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모습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않는 듯 잡초가 무성한 긴 계단길 끝에


서포의 허묘터가 있다

선생이 죽기 전에 직접 묏자리를 정해둔 곳이라고 한다


서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숙종 18년(1692년) 4월부터 9월까지 묻혔던 곳이다


서포는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작은 아버지로서 장희빈과 관련된 두 번의 상소로

 처음에는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불후의 명작 한글소설인 <구운몽>을 집필하였고

그 다음 왕세자 책봉과 관련된 상소 끝에는 절해고도인 노도에 위리안치된다

위리안치 중에서도 그 고통이 극심한 가극안치(가시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에 처해 진다 

  

허묘터를 둘러보고 다시 긴 계단길을 내려가서 초옥터로 향한다


초옥터까지의 거리가 200m라 멀지 않는 거리다



얼마쯤 걸어가니 아직 한창 공사중인 현장이 나오는데


보아하니 서포 김만중 기념관을 신축중인 모양이다


기념관 신축 현장 옆으로 조성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최근 조성되어 마무리 공사 중인 문학공원이 나온다


문학공원 광장의 바다 쪽에는


바다가 확 트이는 경치좋은 곳에 연못을 배경으로 조그만 정자가 있고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

광장 왼쪽편 평지에는 서포의 불후의 명작인 <구운몽>의 등장인물들의 동상이 서 있다

<구운몽>은 서포가 평안도 선천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상심하신 어머니를 위로하기 집필한 한글 소설이다

허균이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이후 서포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써서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파 소설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포의 작품은 허균과 실학파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어 한국소설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되었던 것이다



진채봉



계섬월



정경패



가춘운




<사씨남정기>의 주인공 사씨

광장 오른쪽으로는 언덕길을 따라 <사씨남정기>의 등장인물들과 함께 스토리텔링이 전개되는데

<사씨남정기>는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맞아들이려는 숙종에게 반대하며

장씨 일가의 죄상을 고한 죄로 유배당했을 때 쓴 것으로

유배지에서까지 임금을 걱정하며 잘못을 깨달으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한다

서포가 세상을 떠난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이 죄를 받아 몰락하는 등 소설의 결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사씨의 남편인 유씨



이제부터 <사씨남정기>의 스토리 텔링에 빠져들어 보자































이로써 <사씨남정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문학공원 맨 위에 있는 정자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운다

바삐 서두르면 2시에 출항하는 배를 탈 수도 있겠지만

아직 초옥터를 보지 못했으니  여유롭게 쭉 둘러본 후 4시 배로 나가기로 한다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만 섬 하나 / 검색을 해 보니 '소치도'이다


제일 높은 곳의 정자까지 왔는데 정작 초옥터에 복원이 되어 있다는 초옥(초당)이 보이지가 않는다

작업중인 인부에게 물어보니 초옥터에는 지금 기념관을 짓고 있고

기념관이 완공되면 그 윗쪽 공터에 초옥을 다시 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그럼 아까 지나온 그 공사현장이 초옥터였단 말인가

어쩐지 이정표의 거리가 좀 이상하다고 속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시 돌아온 초옥터

초옥터는 옛날부터 '큰골 허리등배미'라고 불렀던 비탈진 골짜기 옆의 손바닥만한 평지인데

이곳 노도가 고향인 수필가 최옥연씨는 그녀의 저서 <노도 가는 길>에 초옥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서포 선생이 지내던 초가 자리는 내 어릴 적 조무래기들이 소를 몰고 다니던 곳이다.

자치기며 숨바꼭질을 하던 놀이터였다.

나무를 하다가도 땀 흘리고 목이 마르면 목을 축이던 우물도 있다.

천방지축으로 뛰어 놀다가도 힘들고 지치면 하늘을 내리덮고 풀 위에서 곤한 잠을 자던 곳이다"

기념관을 지을 자리가 마땅치않아 초옥터에 기념관을 신축하고

기념관 왼쪽 위 공터에 초옥을 이전,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 복원되어 있던 초옥은 허물어 없어졌다

 여기에서는 바다가 바라다보이는데 이전하여 복원할 자리에서도 바다가 보일런지.....


초옥터 옆에는 거대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동백숲 옆에는 서포가 직접 팠다는 샘터(우물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샘터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지만  공사자재로 주변이 더렵혀져 있어 지금은 마실 수 없을 것 같다

 

<참고자료> 초옥터에 복원되어 있던 초옥 모습

예전에 이효준이 답사를 왔을 때는 초옥을 복원 중이었다고 했다


수필가 최옥연씨는 초옥 방문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 다시 불혹의 걸음으로 선생의 초옥 마루에 앉는다. 낮은 기둥에 등을 기댄다. 빈집의 허기가 등을 타고 오른다.

허구 속에서 하룻밤의 꿈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인생의 초입부터 고서의 행간까지 꼿꼿한 그의 향기가 살아나자

나도 슬며시 그와 도반이 되고 싶었다. 더불어 그가 떠난 빈 초옥의 이웃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해를 유배의 땅에서 갈바람과 함께 그의 문장과 그의 상상력과 함께 머물렀다.

가끔은 나도 죄인처럼 내 안에 숨어서, 나만의 울타리와 나만의 똬리를 새로이 만들기도 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행여 선생이 꼿꼿하게 앉아 경이라도 읽고 있는 듯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빈 방문을 수차례 열고 닫아 본다. 그래도 등줄기를 타는 오싹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느새 거뭇거뭇 산 그림자가 마당을 넘보고 있다. 더 머물고 싶은 미련을 접고 그림자를 밟으며 마당을 나섰다. "

(수필가 최옥연은 현재 울산에서 활동중인 작가로

그녀의 저서 몇 권이 도선인 노도호 안에 비치되어 있어 잠시 읽어 보고 몇 귀절을 인용하였다)


초옥터 주변에는 거대한 동백나무


위 수필가 최옥연씨는 또 이렇게 적었다

 "초옥 입구 계단 옆에는 동백나무 몇 그루가 문지기처럼 붙박이로 서 있고,

밤새 보듬어 안아 온기로 피운 동백꽃 몇 송이가 계절을 놓쳤는지 넋을 놓고 있다.

별도 달도 다 돌아간 늦은 밤에도 저 홀로 적막했던 서포 선생의 벗으로, 때론 그리운 이름으로도 내어주었다.

글을 읽다가도 마음 열어둔 문 밖에다 밤새도록 귀를 내어 걸었을 게다"


아름드리 후박나무가  숲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사진> 남해 호구산 용문사 입구에 있는 서포 김만중 유허비

지난 2014년 4월 산행 때 찍은 사진이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서포의 동상이 내려다 보고 있는 바다 저 앞에 노도가 떠 있다


찔레꽃


골무꽃


아쉬운 마음으로 초옥터를 둘러보고 천천이 발걸음을 돌린다

지금은 11가구 밖에 살지 않는다고 하는데 마을의 규모는 그렇게 작지가 않다


기념관과 문학공원 공사가 모두 끝나고  민속체험관이 개장을 한 뒤 초옥까지 복원이 된다면

이 조용한 마을도 관광객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옛 분교터에 자리잡은 민속체험관




앵강만 건너 저 앞에 설흘산이 우뚝 솟아 있고

 

배 한 척이 지나가는 바다 건너에는 벽련마을이 기다리고 있고

마을에서 무슨 제를 지내는지 꽹가리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온다



날씨 화창한 평일 봄 날 오후, 바다도 배들도 한껏 느긋하게 늘어져 있는 가운데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에 나도 느긋하게 몸을 맡기고 마을회관 앞 계단에 앉아 책(나비타고 청산가세)를 읽고 있노라니

선장이 곧 배가 떠나니 배를 타라고 한다





오후 4시 배로 다시 돌아 온 벽련마을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도를 바라본다




그리고, 40여 분간 기다린 끝에 5시경 버스를 타고 남해터미널로 향하고

터미널에 내리니 5시 30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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