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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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작원잔도길 : 2019. 4. 11

딜라일라 2019. 4. 11. 22:45

아래의 답사기는 2015년 11월 30일 발행한 이효준의 제2 기행수필집인

'부산에서 서울까지 걷다'를 참고로 삼아 사진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글의 많은 내용은 동 수필집에서 발췌, 참고하였습니다

 (2019. 5. 25 追記)

 

지난 2014년 10월 9일  물금역에서 원동역까지의 황산잔도길은 답사를 답사를 한 바가 있다

오늘은 삼랑진역까지의 낙원잔도길 답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원동역에서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에 자전거길로 진입하는 갈림길의 이정표가 있다

 

영남대로의 3대 잔도는 황산잔도(양산), 작원잔도(삼랑진), 관갑천잔도:토끼비리(문경)인데

황산잔도와 마찬가지로 작원잔도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낙동강 자전거길은 2012. 4. 22 개통이 되었는데

낙동강하구둑에서 안동댐까지 385km이고, 물금취수장에서 안동까지는 328km이다

 

 

원동문화생태공원

 

자전거길의 라이더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곳이다

 

 

 

가야진사(伽倻津祠)

가야진(伽倻津)은 가야로 건너가는 나루로 용당나루가 있던 곳이다

황산강(물금 부근의 낙동강) 상류인 이곳은 신라 눌지왕(417~458) 때

신라가 강을 건너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대고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사당은 1406년(태종6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신라 때 부터 국가의 주요 4대강(한강, 금강, 포항의 곡천강, 황산강)에 제사하였던 4독(四瀆)의 하나였고

조선시대에도 매년 나라에서 향축(香祝)과 칙사를 보내 국가의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1,400년 이상 이어져 온 국가제례인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는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이 이어받으면서 제의에 대동놀이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계승되어

1997년 경남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봉행하던 것을 2006년부터는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지내고 있다

 

 

이만도 불망비

 

 

가야진사의 대문인 상경문(尙敬門)은 대문이 세 개다

가야진사의 전설에 나오는 세 마리의 용을 맞아들이기 위해 각각의 문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있다

 

첫 대문인 상경문 뒤에는 재실인 용산재(龍山齋)가 있고 

 

용산재 뒤에는 역시나 문이 세 개인 삼용문(三龍門)이 있으며

 

맨 뒤에는 사당인 伽倻津祠가 자리를 잡고 있다

사당 안에는 '伽倻津之神'이라는 신주 위패가 모셔져 있고

뒷벽에는 부글부글 끓는 강물 속에서 황룡 한 마리와 청룡 두 마리가 힘차게 용트림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가야진사가 있는 이 용당리가 한때는 원동의 중심지였고 면사무소도 있었다는데

잦은 낙동강의 범람으로 1926년 면사무소를 원동역 앞 원리로 이전한 뒤부터 쇠퇴하였다고 한다

 

가야진사 앞은 예전에 용당나루가 있던 곳으로, 강 건너는 김해시 상동면 여차리 용산마을이고

낙동강 1,300리에서 가장 깊다는 용소(龍沼)에는 커다란 용 한 마리가 낙동강 물을 머금고 있는 형상의

해발 49m의 야트막한 용산(龍山)이 짙푸른 강물에 잠겨 있다

용산마을 사람들은 龍山에 龍神이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만 부산-대구 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용산을 관통하게 되었다

 

용산 뒤로 무척산이 보인다

옛날에는 무척산 산행 후 용산 쪽으로 하산을 해서 나룻배를 타고 용당나루에 왔다가 원동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갔었지만 (버스 타고, 배 타고, 기차 타고)지금은 나룻배도 없어지고,

용이 머리를 강에 담그려는 듯한 모양의 용산도 주민들의 반대에도 결국 목 부위에 고속도로 터널이 뚫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터널 위로 동물 이동 통로를 만들어 살짝 덮어 둔 것이다

 

<참고사진> 무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용산 모습 / 마치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용신제 전수회관

 

전수관 앞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용 세 마리를 조각해 놓은 조각상이 있다

가야진사의 전설에 나오는 용들로, 험악한 인상의 용들이 아래 위로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형상이다

 

위에 있는 용은 남편 용인 황룡일 것이고

아래에 있는 용들은 본처 용과 첩 용인 청룡들일 것이다

 

 

가야진사를 떠나면서 다른 각도에서 본 용산 모습

 

용산 뒤로 보이는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지만

 

용산은 여전히 낙동강에 머리를 담그고 물을 마시고 있다

터널이 뚫린 후 가야진용신제 보존회에서는 龍神과 龍山을 위로하는 '용신위안고유제'를 올렸다고 한다

 

둔치 길 가장자리에 지천으로 무리지어 피어있는 갈퀴나물꽃

 

가야진사에서 길을 따라 너른 둔치를 지나 자전거길을 향해 가는데

저 앞에 천태산이 떡 하니 버티고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시루봉

 

 

낙동강 위 교량 자전거길이 다시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는 밀양이다

 

길 오른쪽 위에 경부선 터널이 보이고

 

이 경계판을 지나자마자

 

철길 아래 암벽의 허리에 작원잔도 옛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작원잔도(鵲院棧道) 유적지가 나온다

 

 

직각에 가까운 암벽에 작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납작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겨우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길 아래 낭떠러지 밑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있다

자전거길이 없는 옛날의 이 잔도길을 걸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의 아찔함이 느껴진다

옛날에 이 잔도로 원님이 지나가다가 중심을 잃고 추락사하였다 하여 이 암벽을 원추암(員墜岩)이라 불렀단다

 

지금은 데크 다리 위에서 잔도를 볼 수 있어 행운이지만

자전거길이 생기기 전에는 배를 타고 와서 답사를 하였다고 한다

 

 

 

 

문경 관갑천잔도에 걸려있다는 시판 속의 시를 인용해보자

요새는 함곡관처럼 웅장하고

험한 길 촉도같이 기이하네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조선 초기 문신인 면곡 이변갑(1380~1434)의 한시 '관갑잔도'

 

 

 

저 철길 옹벽은 110년 전에 일본인들의 토목기술로 건설한 것인데 지금도 안전하고 탄탄하다

 

 

강 건너 김해 산자락에 빨간 지붕의 작은 예배당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삼랑진이 가까워지자 강폭이 넓어지기 시작한다

낙동강은 삼랑진부터 강폭이 최대로 넓어진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철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삼랑진에서 물금 사이라고 한다

 

 

그 옛날 작원관이 있었던 자리는 기차길과 옹벽으로 인해 흔적도없이 사라져 버렸다

작원관은 천태산과 낙동강 사이의 천혜의 요새여서 유사시에는 적을 방어했고

평시에는 길손을 기찰하는 관문이었다

원동(院洞)의 지명도 작원관원문(鵲院關院門)이 있는 고을(洞)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데크 다리가 대밭 속으로 지나간다

이 대밭 자리에는 상주막이 있었던 자리라는데

해가 지면 작원관이 문을 잠그고, 길손들은 상주막에서 자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상주막 대신 길손들이 쉬고 가라고 설치해 두었나

벤치도 있고.........

 

아담한 정자도 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강변으로 뽀족 머리를 내밀고 있는 시루봉이 자꾸 눈길을 끈다

나중에 알아보니 작원마을에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고 하던데 언제 한 번 답사를 해보고 싶다

 

 

대밭에서 조금 진행을 하니 고기잡이 보트가 몇 대 매여 있는 나루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이전 복원한 작원관이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뱃길로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로 오가던 작원나루다

 

나루를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도 이곳에서 검문을 받아야 통과를 할 수 있었고

근처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들의 숙소인 역원(驛院)도 있었다는데

지금의 작원마을이 아니었는가 싶다

 

나루터 건너 삼랑진의 매봉산과 다리가 보인다

 

작원나루 옆의 철길 굴다리를 지나면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원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이곳이 한적한 강변마을이지만 한때는 상당히 위세를 떨치던 번잡한 고을이었을 것이다

 

마을 옆에는 1995년 복원된 작원관(鵲院關)이 있다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자를 취하였고

역원의 원(院)자와 출입하는 화물과 사람을 검문하는 곳인 관(關/빗장 관)을 써서 작원관이 되었다

 

 

성문에는 한남문이라 새겨져 있고

 

누각에는 공운루(拱雲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대로의 2대 관문은 문경새재의 관문들과 이 작원관문인데

문경새재 관문은 국민적 관광지가 되어 관광객들이 밀려드는데

작원관은 삼랑진역으로 가는 도로에서 한참 들어가 있는 외진 곳에 위치하여 초라하기만 하다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철도의 서쪽 낙동강변의 언덕에 옮겨졌으나

1936년 대홍수에 쓸려 내려가 사라져 버린 것을

당시 삼랑진중학교 교장을 지낸 송만술 선생이 복원에 앞장 선 것을 기념한다는 내용이다

  

작원관 비각

 

 

비각 안에는 '작원관원문기지비'와 '작원대교비', '작원진석교비'가 있는데

각각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작원관을 복원하면서 이곳에 한데 모아 옮기고 비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의 '작원관원문기지비'

 

그 옆 높은 계단 위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작원관위령탑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를 벌인 곳이 작원관전투였다고 한다

이 전투로 관군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왜병의 북진을 하루 늦추게 하였다고 한다

 

 

 

 

 

작원마을에서 작원나루로 돌아와 나루 옆의 자전거길을 걸어가면

처자교 발굴에 대한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에는 처자교에 대한 전설과

2011년 6월 4대강 사업을 하던 중 강변에서 발견된 발굴현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전설이 전설로만 그치지 않고 역사적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폭 4.25m, 길이 25.3m, 높이 3.2m의 쌍홍예교(쌍무지개 돌다리)로

미적 감각이 돋보이고 운치 있는 다리였으나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는

낙동강물에 의한 훼손 및 유실 방지를 위해 그 자리에 그대로 매립을 하였다

 

처자교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갈대숲 사이를 헤집고 가보니 

 

지금은 가매장 터 처럼 흙에 덮인 채 안내판만 덩거러니 세워져 있다

 

처자교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10분 정도 더 가다가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자전거길을 벗어나 삼랑진역으로 향한다

 

 

도로 옆의 지하통로를 통해 길을 건너서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가면

 

삼랑진역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온다

 

마주보이는 천태산 중턱에 보이는 동그란 원 안의 건물은 부은암(父恩庵)이고

그 왼쪽 위의 건물은 안태호 위 양수발전소 관련 건물이다

저 父恩庵은 무척산의 母恩庵, 불모산의 長遊寺, 지리산의七佛寺와 함께

가락국의 전설이 서려있는 암자이다

 

삼랑진역 도착

작원잔도길 답사는 여기에서 끝이 나는데

이제는 삼랑진 강변을 따라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선생의 소설 속 현장인 '뒷기미나루'까지 답사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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