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등반사진/부산,경남의 산

곤명 다솔사와 봉명산(408m) : 2011. 9. 3. 성묘 후 동생과 함께

딜라일라 2017. 12. 16. 00:43



사천 곤양에 있는 산소의 벌초를 마치고 인근의 다솔사를 찾앗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에 소재한 다솔사(多率寺)는

봉황이 노래한다는 鳳鳴山이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신라 지증왕 때인 503년 영악대사가 영악사로 창건했다고 전해오기도 하고,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좌우지간 지금으로부터 1508년 전에 창건된 고찰이다

 

‘많은 불심과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많을 多, 거느릴 率)는 이름 때문인지

 이 절에서 무슨 일을 도모하면 반드시 일이 성취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고

조선시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왜군을 크게 무찌른 승병기지로 삼은 성지로서도 잘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절 입구에 늘어선 굵은 소나무는 전장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일주문과 사천왕이 없는 이 절에는 이 '대양루' 오르는 돌 계단에서부터 절집이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 적멸보궁까지 오르는 길의 돌계단은 모두 108계단이다

 

대양루



대양루는 현존하는 다솔사 경내에서 창건 이후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도 화재를 면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유형문화재 89호다

 


대양루를 옆으로 돌아가면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계속 이어진다

 

적멸보궁

적멸보궁의 현판을 쓴 사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성파 하동주 선생의 수제자로

 곤양에서 1999년 94세로 돌아가신 도연(陶然)  김정(金正)선생이라 한다

 




적멸보궁과 바로 마주보고 있는 대양루

 

적멸보궁 내에는 와불이 있고, 밖으로 통해 있는 공간 뒤로 진신사리탑이 보인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모셔지지 않는 곳이 많으나 다솔사의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것은 대웅전 안의 삼존불을 개금불사하기 위한 과정에서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를  발견하고 난 뒤에  대웅전 현판을 내리고 적멸보궁 현판을 올렸다고 전한다

 

와불 뒤쪽 창문 밖으로 사리탑이 보인다

 

 극락전



 응진전



적멸보궁 뒤쪽에 있는 사리탑




108과 진신사리 사진

 

일제 강점기 때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다솔사에는

한용운과 김동리 선생이 기거했었던 안심료(安心寮)가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사찰 내 안심료(安心寮)는 만해가 머물면서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문영빈, 오제봉, 설창수,

 강달수, 이기주 선생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선언문 초판을 집필한 곳이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안심료에서 '등신불'을 집필했다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를 찾은 것은 1937년 봄. 

원효사상을 연구하여 체계를 정립한 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스님이

 문맹퇴치를 위해 절 아래 마을에 세운 학당의 야학 교사로 합류했었는데

 이후 김동리 선생은 5년여 다솔사에 거주하며 마을 어린이와 여성, 심지어 머슴에게까지

우리글과 산수를 가르쳤다고 한다

 

한용운 선생의 회갑 기념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심었다는 황금편백은

안심료 앞 마당에 15그루 중 7그루만 남아 아름드리가 되어 황금빛으로 곧고 푸르게 빛나고 있다고 하는데

 미처 사진에 담지를 못해 아쉽다


다솔사 주변은 200~30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야생 차나무밭이 다솔사를 감싸고 있는데

 신라시대부터 자생하는 차밭도 많다

 여기에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주지로 있으면서 주변에 차나무를 직접 심고 돌보며 차를 마셨다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주변 1㏊가량에 재배한 차나무에서 반야차를 만들어 보급한

 우리나라 근대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1973년 초판 발행된 ‘한국의 다도’는 현대 차 공부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1977년 다솔사에서는 한국 최초의 차인 모임도 발족됐다

다솔사를 찾으면 말 그대로 우리 차 문화를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11:20   다솔사 답사를 마치고  절 뒤쪽 등산로 입구 산행시작

 


군립공원에서 조성한 5.2km에 달하는 둘레길도 있다

 

 봉명산 정상에 있는 나무정자




11:45  산행시작 25분만에 오른 봉명산 정상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의 정상에 용이 사는 못이 있는데 그 용이 조화를 부려

 수도 금산(경주)사람의 눈이 멀어 고통을 받았다 한다

 해서 그 못에  불에 달군 화철석(火鐵石)을 빠트리니 그 용이 고개 너머로 도망을 하고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이 다시 없었다는 전설과 함께 이 산이 그때부터 이맹산(理盲山)이라 했는데

한자 뜻풀이를 하면 '소경을 다스린다'라는 뜻이 된다

동생과 함께 성묘를 한 후 처음으로 같이 산을 올랐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한려수도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와 남해바다가 융단처럼 펼쳐진다

여기서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며 토해내는 뱃고동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삼천포 와룡산도 저 멀리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고 있다

 


봉명산 정상을 지나 헬기장을 거쳐 보안암으로 가는 길

 



보안암의 이끼 낀  돌담장이 인상적이다

 


12:10   보안암


보안암 석굴


보안암 지장전



고려말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전해진 보안암 석굴은

 경주의 석굴암처럼 먼저 불상을 안치한 뒤 만들었는데 

 석굴 안의 커다란 돌부처의 미소를 머금은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사암질 활석을 쌓아 계단과 기초를 만들고, 큰 돌을 지붕을 이어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님과 16 나한상을 모셔 두었다

 보안암석굴은  석굴암과 같이 석불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횡혈식 석실고분의 형태를 띠고 있다

 

1966년 신라오악(五岳)의 불교유적의 지표조사를 맡았던 불교미술사의 권위자인

 황수영 박사에 의해 발견되고 조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경주 석굴암의 원형복원을 수행했던 황박사는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하고

토함산의 석굴암과 팔공산의 군위삼존굴에 이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굴이라 평가했다

다만 조성연대에 있어 추정이긴 하나 불상양식을 미루어 려말선초(麗末鮮初)로 추정한다고 밝힘으로  

학계에서는 석굴암을 모방한 양식으로 보아 경주와 군위의 석굴처럼 국보에는 이르지 못하고 

지금까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다







13:00   다솔사 원점회귀

(총 산행시간 : 1시간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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