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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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영지(影池) - 괘릉(원성왕릉) : 2024. 5. 25.

딜라일라 2024. 5. 25. 21:11

 

오전에 외동읍에 있는 아기봉산을 오른 후 인근의 영지를 찾았다

 

 

 

외동읍 입실리 삼아아파트 정류장에서 600번 버스를 타고 몇 정류장을 지나 영지입구에서 내린다

 

 

영지를 향해 조금 가다가 왼쪽에 있는 영지 석불좌상으로 간다

 

 

영지 석불좌상

 

 

아사달이 탑을 완성한 뒤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아사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아사녀의 명복을 비는 석불좌상을 영지 곁에 조성하였는데

그것이 이 영지 석불좌상이며 아사녀 석불좌상으로도 불린다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얼굴에 손상은 많지만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까지 그런대로 온전히 남아 있으며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조각이 되었다

 

 

 

아사녀 석불좌상을 뒤로하고 영지(影池)로 왔다

영지주차장 한 켠에는 '아사달의 혼' 조형물이 영지를 바라보고 우뚝하니 서 있다

조각상에는 무영탑을 가운데에 두고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포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사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탑의 그림자를 대신하여 무영탑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정작 아사녀는 애끓는 한을 남긴 채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아~ 사랑이여 그리움이여..........

 

 

뒷면

 

 

영지(影池)

 

 

영지 뒤로 보이는 산은 마석산(磨石山)인데 

저 마석산도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을 간직하고 있어 많은 산꾼들이 찾는 유명산으로

2년전인 2022년 3월에 산행을 하였다

 

 

성호리조트와 영지

 

 

영지 전망대에 서니 드디어 저기 동북 방향에 토함산이 보인다

불국사가 가장 잘 보이는 이 자리에서

아사녀도 탑이 완성되어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고대하며 오매불망 낭군님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탑의 그림자는 커녕 불국사 자체도 너무 멀어 잘 보이지를 않는다

하동 칠불사에도 영지가 있는데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칠불사까지 왔으나 출가한 몸이라 상면할 수가 없어

절 밑에 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에 비치는 왕자들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갔다는 연못이다

그 칠불사의 영지는 절에서 가까워 물 위로 비치는 왕자들의 그림자를 볼 수는 있었겠지만

이 불국사의 영지는 그야말로 전설일뿐이다

 

부여길 오백리 길 임두고 가는 길에

서라벌에 맺은 사랑 영지에 번지면은

달빛도 별빛도 울어주던 그날밤

나는가네 나는가네 임없는 부여땅에

 

 

안타까운 심정에 줌으로 최대한 당겨보니 저기 숲 속에 불국사의 지붕들이 조금 보이고

 

 

산 위로는 석굴암이 겨우 카메라에 잡힌다

 

 

영지 전망대를 떠나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반대편의 길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영지 연못가를 따라가는 반대편의 길과는 달리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변의 길은

우거진 숲과 형형색색의 꽃들로 아름답게 조성이 되어 있고

 

 

 

울창한 벚나무 숲길은 하늘이 보이지를 않을 정도다

봄철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가 되면 이 영지 둘레길은 꽃나들이 길로도 이름이 나 있다고 한다

 

 

 

영지 답사를 마치고 괘릉으로 가는데

 

 

영지 입구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이라 걸어서 가는데 꼭 1천 걸음에 괘릉 입구에 도착을 한다

 

 

괘릉으로 가는 길  주변의 소나무들도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하고 있다

 

 

괘릉 주차장

 

 

괘릉과  릉 입구 좌우에 서로 마주보며 도열하고 서 있는 석물들

 

 

괘릉(掛陵) /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무덤으로 

능을 쓰려고 연못을 메웠는데 물이 새어 나와 널을 걸고 그 위에 원성왕의 유골을 안치한 데서 유래한다

괘릉은 석물과 함께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예술성이 뛰어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능 오른편의 석물들

맨 바깥쪽에는 능역의 표시로 세우는 팔각형 돌기둥인 화표석(華表石)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무인상, 문인상이 서 있으며

맨 안쪽에는 돌사자 2마리가 능을 지키고 있다

이런 구성은 이 원성왕릉이 처음이며 이후 신라 왕릉 조각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무인상(武人像)

이국적인 얼굴의 무인상은 서역인의 얼굴이며 

이것은 당시 신라가 서역과 문물교류를 활발히 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인상(文人像)

관복을 입은 문인상도 관복 위에 갑옷을 걸쳤고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는데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는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칼 끝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관습대로 문무(文武)로 분류를 하지만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신라에는 문무(文武)의 구분이 없었기에 

이런 차림새의 인물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돌사자(石獅子)

좌우 4마리의 돌사자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능 왼편의 석물들도 오른쪽과 같은 배열로 배치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4마리의 돌사자 중 입구인 남쪽을 경계하고 있는 이 돌사자의 귀는

다른 사자들과는 달리 귀가 바짝 서 있는 것이 다르다

 

 

봉분의 가장자리에 돌판(面石)과 버팀돌로 만든 둘레돌이 있으며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다

 

 

버팀돌에는 무장을 한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능 뒷쪽은 석축이 있으며 그 사이에 좁은 도랑이 있어 고이는 물을 흘러보내고 있다

보아하니 옛날부터 이곳은 물을 많이 머금는 습지였던 모양인데

해설사에 의하면, 지금도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내리면 능 앞쪽의 잔디밭이 물로 질펀하게 고인다고 한다

 

 

원성왕이 매일 바라보는 남쪽으로 펼쳐지는 조망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무슨 산인가....  오전에 다녀온 아기봉산도 저 방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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