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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 - 황룡사지 : 2024. 5. 16.

딜라일라 2024. 5. 17. 16:42

 

낭산 기슭의 유적지 답사를 마친 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분황사에서부터 오후 답사를 시작한다

 

 

분황사(芬皇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모전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이 있다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 模塼石塔)

분황사 창건 당시인 634년(선덕여왕 3)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뿐이다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은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로 쌓은 탑을 말한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각솜씨가 부드럽고 사실적이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을 만들고 문비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문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운 인왕상(금강역사상)이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매우 동적이며 근육의 표현에도 양감이 강조되어 사실적인 조각표현을 볼 수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받침돌이다

 

 

분황사 석정(石井)

외부는 팔각 모양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을 모시고 있는 보광전(普光展)

 

 

보물 제2162호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수리 과정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1609년에 구리 5천360근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요사채

 

 

금당터(金堂址)는 텅텅 비어 있다

분황사에는 석가모니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이 없고

약사여래불을 모신 보광전만 있다 

 

 

대종각(大鐘閣)

 

 

황룡사지 가는 길

분황사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깥 남서쪽 황룡사지로 가는 길목에 있다

 

 

보물 제2143호 분황사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된 깃발인 ‘당’을 걸기 위한 기둥인 ‘당간’을 고정하는 지지체로

통일신라 초기부터 사찰 입구에 본격적으로 세워진 조형물이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하게 귀부형(龜趺形) 간대석(竿臺石)을 하고 있다

간대석(竿臺石)은  당간을 받치기 위해 하부에 받친 석재단을 말한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황룡사지(皇龍寺址)

보문사지는 주변이 논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이 황룡사지는 사방을 울타리로 둘러 잘 보전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553년(진흥왕 14)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하였고, 645년(선덕여왕 14)에 9층목탑을 건립하면서 완성되었다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

 

 

황룡사(皇龍寺)는 삼국시대 가장 큰 절로 대표적 왕실사찰이었다

신라3보인 장륙존상(丈六尊像)과 9층목탑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신라 3보 가운데 2개가 황룡사에 있을 정도로 황룡사는 신라를 상징하는 큰 사찰이었다

장륙존상(丈六尊像)은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두 다리와 신광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장륙존상은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층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황룡사와 함께 완전히 소실되었다

 

 

 

우물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 분황사는 용궁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황룡사와 분황사는 남북으로 거의 잇달아 있다고 해도 될 만큼 거리가 가깝다

그렇다면 용궁은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있어야만 하는데

이 신라시대 우물이 바로 그 용궁이라고 추정한다

옛날 신라 사람들은 용궁에 용이 산다고 믿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고

진흥왕도 새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서 궁궐 대신 이 황룡사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황룡이 나타난 곳이 이 용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총면적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탑 앞쪽에도 역시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건물이 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가람구조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동(東) 금당터

 

 

동(東) 회랑터

 

 

종루터(鐘樓址)

 

 

황룡사탑 건립 아비지(阿非知) 기념비

목탑을 건립한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목탑지(木塔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에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이간(伊干)·용춘(龍春)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목탑지(木塔址)

 

 

목탑의 심초석(心礎石)

황룡사 목탑지는 심초석과 함께 64개의 초석이 있었으나

지금도 거의 대부분인 무려 62개의 초석이 존재한다 

 

 

심초석(心礎石)

현재 노출되어 있는 것은 초석을 덮고 있는 덮개돌이고 심초석은 그 아래에 있는 것으로

동서 435cm, 남북 300cm의 부정형의 긴타원형이다

 

 

경루터(經樓址) / 경루(經樓)는  불경을 보관해 두는 누각이다

 

 

금당지(金堂址)

 

 

 

서(西) 금당터

 

 

서(西) 회랑터

 

 

강당터

 

 

황룡사 역사문화관

 

 

연화하대석, 간주석과 그 옆의 초석

 

 

황룡사 9층목탑 1/10 모형

<삼국사기>에 의하면 탑의 실제 높이는 약80m에 달하는 거탑(巨塔)이라고 한다

 

 

 

황룡사 9층목탑을 새긴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사진

 

 

 

보물 제1870호  황룡사 9층목탑(皇龍寺 九層木塔) 찰주본기(刹柱本記)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수하고, 목탑의 건립 내력과 871년부터 872년까지 중수한 과정을

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새긴 기록물이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옆 넓디넓은 마당에 보존하고 있는 각종 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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