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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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과 주변 유적지(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능지탑지-낭산마애삼존불-망덕사지-신문왕릉-효공왕릉) : 2024. 5. 16.

딜라일라 2024. 5. 17. 16:39

 

며칠전인 5월 9일 명활산과 명활산성을 오른 후

인근의 설총묘와 보문사지 유적, 황복사지 3층석탑까지 답사를 하면서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남겨두었던 낭산(狼山) 주변의 유적들을 오늘 답사를 한다

 

 

사천왕사지는 경주 시내 동남쪽에 위치한 경주 낭산 남단의 낮은 언덕에 위치한 절터로

주변에 경주 선덕여왕릉, 능지탑, 신문왕릉, 효공왕릉 등이 있고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경주 망덕사지가 있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사천왕사(四天王寺)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찰로

삼국통일 직후인 679(문무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건너편의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문무왕 15)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명랑법사(明郞法師)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가사(假寺)를 사천왕사로 고쳐짓고 이에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입구의 동귀부(東龜趺)와 동비각지(東碑閣址)

 

 

귀부의 거북이 머리가 잘리고 없다

 

 

서귀부(西龜趺)와 서비각지(西碑閣址)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북쪽 가운데에 초석이 남아 있는 금당지(金堂址)가 있고 동서로 탑(塔)을 설치한 쌍탑식(雙塔式) 가람(伽藍)배치다

동탑은 탑지만 있고, 서탑은 기단 일부만 복원한 채 그대로 있다

고려사에는 문종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때까지는 사찰이 유지된 것을 알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시 유금오록(遊金鰲錄)을 통해, 15세기 후반 경 이미 민가(民家)로 변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습 조사된 바 있으나

전제적인 가람배치와 녹유소조상의 배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동탑지(東塔址)

 

 

금당지(金堂址)

 

 

서탑지(西塔址)

 

 

기단 부분만 일부 복원되어 있다

 

 

동(東)단석지

 

 

사천왕사지를 떠나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

 

 

 

낭산(狼山)은 신라 시대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온 곳으로 '서라벌의 진산'이라고 불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실성왕 12(413)에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떠 있었고

이후 낭산은 신라 왕실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다

낭산에는 신라 시대의 왕릉과 사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선덕여왕릉, 황남대총, 사천왕사지, 황복사지 등이 대표적이다

 

 

 

선덕여왕릉은 낭산 정상에 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善德女王陵)

선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며, 진평왕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추대로 왕이 되었다

632년 왕이 되어 647년에 승하할 때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고, 특히 첨성대(瞻星臺)ㆍ황룡사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으며

김유신ㆍ김춘추 등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왕릉이 있는 자리가 낭산 정상이다보니 삼각점도 왕릉 바로 앞에 있다

 

 

선덕여왕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 위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어느 곳을 말하는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은 도리천은 낭산의 산정이라고 알려 주었고

그래서 이 곳 낭산의 신유림(神遊林) 정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고 호국신(護國神)인 사천왕을 모셨다

이후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사천왕이 있는 곳을 사왕천(四王天)이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도리천이라 한다

이로써 낭산 정상이 도리천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봉분 아래에 쌓아 올린  둘레돌은 1949년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선덕여왕릉을 떠나 능지탑지로 가는데

 

 

선덕여왕릉 바로 뒤에 있는 낭산(狼山) 정상(해발 99.5m)을 밟아 본다

 

 

 

사적지이다보니 높은 나무가지 대신 발 아래에 숨기듯이 시그널이 달려 있는데

보아하니 최근에 메달은 듯 하고 이것도 곧 관리인에 의해 철거가 되겠다

 

 

능지탑지(陵只塔址)

능지탑은 예로부터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으로 불려왔는데

무너진 채 1층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신라삼산조사단(新羅三山調査團)이 1969년 이래 1971년까지 4차에 걸쳐 조사한 끝에

197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이 탑은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지금과 같은 규모의 평면에 5층으로 쌓아올린 석조 축단형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1975년의 해체·발굴조사로 정사각형 석단 중앙부에 찰주석이 지층 아래까지 세워져 있고

찰주석(擦柱石) 하부에는 공간을 포함한 토석 유구가 있으며

토석 유구와 주변 지층이 까맣게 그슬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화장묘(火葬墓)로 추정되었다

그러니까 원래 창건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된 묘가 있었으나 이것이 언제인가 소실되자

이 화장묘를 보존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외부에 정사각형 석단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대왕의 화장 장소로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능지탑이 능시탑(陵屍塔)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 둘레의 중대석에는 12지상 9구를 방위에 맞추어 같은 간격으로 기둥처럼 배치하였는데

12지상 가운데 뱀(남면)·범(동면)·용(동면) 등 3구는 없어졌다

현존 12지상 중 일부는 낭산 동쪽 황복사(皇福寺)터 앞에 있던 미완성된 왕릉 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주변에는 정비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토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낭산 마애삼존불 좌상은

능지탑지에서 조금 더 북쪽에 있는 중생사(衆生寺)의 지장전에 보존되어 있다

 

 

중생사(衆生寺)

 

 

마애삼존불 좌상이 보존되어 있는 지장전

 

 

낭산 마애보살삼존 좌상(狼山 磨崖菩薩三尊 坐像) / 낭산 마애삼존불

조각한 바위의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해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1980년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중앙의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로

둥글고 비만한 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살짝 미소를 띤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좌우의 협시상들은 한 발은 안쪽으로 접고 다른 발은 약간 편 자세로, 갑옷을 입은 무장상(武將像)이다

이 협시상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것으로 보아 신장상(神將像)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인 지장보살

 

 

왼쪽의 신장은 오른손에 칼을 들은 것이 제법 선명하게 보이는데

 

오른쪽 신장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지만 형체 자체가 구별이 안된다

 

 

중생사 앞에 길게 그 모습을 펼치고 있는 남산(금오산/金鰲山)

 

 

낭산 마애삼존불에서 사천왕사지로  돌아와

7번 국도 건너편에 사천왕사지와 마주하고 있는 망덕사지로 간다

 

 

망덕사지(望德寺址)

망덕사는 문무왕 19(679)에 당나라가 사천왕사(四天王寺) 창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신을 파견하자

신라 왕실이 이를 속이려고 신문왕 5(685) 임시로 급히 지은 절이다

그 뒤 효소왕 1(692)에 다시 지어 완공하였다

현재 동서 목탑터와 금당(金堂), 회랑(廻廊)터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금당터(金堂址)

 

 

동탑터(東塔址)

 

 

서탑터(西塔址)

 

 

망덕사지 당간지주(望德寺址 幢竿支柱) : 보물 제69

두 지주는 65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겉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는데, 바깥면에만 양변의 모서리를 윗부분에서 아래로

1.57정도까지 깎은 장식적인 의장(意匠)이 보인다

 

 

통일신라 제31대 신문왕릉(神文王陵)

 

 

왕릉의 갑석 보수중으로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신문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政明) 또는 명지(明之)로 문무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 부인은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681년에 왕이 되어 692년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국학(國學)을 창설, 학문을 장려해 설총(薛聰), 강수(强首) 등의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승하한 뒤 경주 낭산(狼山)의 동쪽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밑둘레에는 벽돌모양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해 담장을 쌓아올리듯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려 무덤 보호석으로 하였다

가로·세로 90, 두께 50되는 다듬은 돌을 대각선으로 곱게 잘라내어 만든 삼각형 받침돌 44개를

보호석에 일정한 간격으로 받쳐 무덤 외부를 매우 튼튼하게 하였다

 

 

왕릉 주변을 수호신처럼 둘러서 있는 오래된 노송

 

 

 

효공왕릉(孝恭王陵) : 통일신라 제52대 효공왕의 능

 

 

효공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요()이며,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로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이다

897년에 왕이 되어 912년에 승하하였으며

 15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의 공략에 국토를 빼앗겼다

죽은 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 옆에 묻었다고 하여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7대 일성왕릉을 효공왕릉으로 보는 설도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한 3, 4개의 호석(護石)이 보이고 있어

원래는 밑둘레를 따라 자체적으로 보호석렬(石列)을 마련한 것으로 보이며

 

 

일반 민묘보다 규모가 조금 크게 보이는 외에,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효공왕릉 앞 전경

이로서 낭산 일대의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하여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답사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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