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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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봉종택 : 2021. 4. 21

딜라일라 2021. 4. 22. 12:16

안동 봉정사 가는 길 도중의 학봉종택을 찾았다

부산 동부터미널에서 7시 5분에 출발한 버스는 2시간 10분만인  9시 15분에 안동터미널에 닿는다

봉정사로 가는 시내버스인 351번 버스가 10시 40분에 있으니 1시간이 너머 남았기에

계획한 대로 택시를 불러타고 학봉종택까지 갔더니 택시비는 6천원이 나온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종택

 

종택 입구의 이 안내판을 보면 

학봉은 퇴계(退溪) 이황의 고제(高第)학통 전수의 징표인 병명(屛銘)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 고제(高第)라는 것은 지금의 수제자로서 적통을 이어 받는 것인데

퇴계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그들의 사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400년간의 병호시비(屛虎是非)에 휘말리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내 나름대로 집약하여 올린 아래의 자료에서 밝혀본다

 

경상북도는 2020년 11월 20일 조선시대 창건되었다가 훼손된 호계서원을 복원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고유제를 계기로 퇴계 위패의 왼쪽 옆자리를 놓고 400년간 벌인 두 문중의 다툼이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병호시비(屛虎是非)'로 불리는 두 가문의 갈등은 영남 3대 시비 중 하나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문중 간 벌어진 사건이다

 

퇴계(退溪) 제자들이 호계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두 번째 서열인 왼쪽 위패를 누구의 것으로 하느냐를 두고 다투면서 발생한 3차례의 시비를 말한다

‘병호시비’에서 ‘병’(屛)은 서애를 배향한 병산서원을, ‘호’(虎)는 학봉 중심의 호계서원을 지칭한다

 

당시 학봉 문중은 서애보다 네 살 위인 점을 들어 나이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애 문중은 학봉보다 벼슬이 높았던 점을 내세워 관직에 따라 정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 시비는 이후 퇴계 적통 시비로까지 이어지면서 갈등이 커졌다

 

퇴계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나이가 아닌 벼슬 순'으로 결론짓기도 했지만

논란은 400여년간 갈등을 빚어왔으며, 영남유림을 둘로 갈라놓기에 이른다

 

두 문중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결국 호계서원 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은 사라졌고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류성룡의 위패는 병산서원(屛山書院)으로 갔고,

김성일의 위패는 낙동강변의 임천서원(臨川書院)으로 갔다

 

호계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1573년 여강서원으로 창건된 후

숙종 2년(1676년) 사액되면서 호계서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7년 뒤 강당만 새로 지어졌는데

이마저도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임하댐 아래로 옮겨졌지만 습기로 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유림은 다시 이건과 함께 서원의 복설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경상북도가 총사업비 65억원을 들여 호계서원을 이건하고 복원도 추진하여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호계서원을 복설했다

 

호계서원 복설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묵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경상북도에서는 세 분의 위패를 원래 있었던 호계서원으로 다시 모시되,

서애를 퇴계 위패의 동쪽에, 학봉은 서쪽에 두되 그 옆에 학봉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중재했다

서애는 높은 자리를, 학봉은 두 명의 자리를 보장하는 화해안을 제시하였고,

두 학파가 이에 동의하면서 400년간 이어진 영남유림의 병호시비는 화해의 물꼬를 텃고,

이날 호계서원에서 '복설(復設) 고유제'를 지냄으로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음주가무와 노름으로 수백억대의 가산을 탕진한 당대의 파락호, 난봉꾼 행세를 하며 

빼돌린 돈을 만주의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딸의 장롱 구입용 혼수자금까지 독립운동자금으로 송금해 버리는 바람에

딸은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울면서 가져갔다는 일화도 있는 독립투사였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오자 1762년(영조 38)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겼고

1964년 다시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둬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했다

 

 

 

문을 잠구어 둔 이 곳은 아마도 이 문중의 제실인 듯 .....

 

실로 몇 십년 만에 보는 제비가 안채 처마 위에 둥지를 틀고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지만

둥지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금단의 구역인 살림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아야 하기에 이 사진만 카메라에 담는다

 

학봉종택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학봉기념관을 찾는다

 

학봉의 초상화에서도 보이듯이 그의 강직함이 두드러져 보인다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으로 보듯이 어디에서나 누구앞에서나 할 말은 다했고

임진왜란 전 왜국에 통신사 부사로 갔을 때에도 왜인들의 잘못에 대하여 엄격히 꾸짖었을 뿐만 아니라

 임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선봉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었다

 

 

그러나, 학봉의 가장 아픈 점은 

황윤길과 함께 왜국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 온 뒤에 왜국의 조선 침략 징후를 보고할 때

왜국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배웠던 역사에서는 당파 싸움에 휘말려  서인(西人)인 정사(正使) 황윤길과는 달리

동인(東人)인 부사(副使)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관상이나 여러가지를 볼 때 감히 조선을 침략할 위인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 당시의 학봉의 보고는 

정사의 말처럼 당장 왜적이 사신들의 뒤를 따라 금방 쳐들어 올 것이 아니고

왜적이 오기도 전에 조야가 겁에 질려 혼란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정사의 보고에 반한 보고를 한 것이라는데

후손들에 의한 나름의 변명이지 아닌가 싶다

그 당시에 학봉도 왜적의 침략을 어느 정도 예측을 했었다면

불과 2년 뒤에 발발한 임란에 대한 대비에 앞장서야 했었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서도 당파 관련 주장은 일제가 침략을 합리화 하기 위한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왜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학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전투에 임했으며

진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3만여 왜적을 격퇴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여기에서 내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 것은 진주성 전투의 영웅 김시민 장군에 대한 이야기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순절한 위인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학봉이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와서 

임란이 발발하자 산으로 숨은(?) 판관 김시민을 불러내어 초모관으로 삼고 전투에 임하게 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그것은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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