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읍성은 현재의 동래구 수안동, 안락동, 명장동, 명륜동, 복산동 일대에 존재했던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읍성이었다
조선전기 동래읍성은 현재의 동래부동헌을 중심으로 해 주위를 원형으로 쌓은 평산성으로
1387년 고려 우왕 13년에 처음으로 축성되었다가
1446년 세종 28년에 개축되었고, 1731년 영조 7년에 증축된 후
1895년 고종 32년에 폐성되었다
조선후기 동래읍성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증축한 것을 기초로 하는데
5개의 문과 1개의 암문이 있었으며 3개의 장대를 갖추었고, 모든 문에 옹성을 둘렀다
그리고, 망월산과 마안산을 읍성 권역으로 편입시켜 평산성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늘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옛 성문 터를 둘러보면서 동래읍성의 윤곽을 가늠해 본다

조선전기 동래읍성 모형(수안역 임진왜란 역사관)

1760년에 그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순절도'의 동래읍성
보물 392호로 현재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 동래부지도에 묘사된 조선후기 동래읍성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대략적인 구조

19세기 말에 촬영된 동래읍성 남문(南門)
동래읍성의 남문은 6곳의 출입구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이층 문루를 올렸 으며 외측에는 주조문(朱鳥門), 내측에는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남문 안쪽 모습 /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복원된 남문 무우루(無憂樓) 현판

남문의 옹성문인 세병문(洗兵門) 모습

세병교(洗兵 橋) 전경
세병교를 통해 초량왜관과 부산진성으로 내통했다고 한다

수안역(壽安驛)
수안역은 성벽에서 30m 남짓 떨어진 서남쪽 해자(垓字)가 있던 자리다
해자(垓字)란 성 밖에 물길을 파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조물이다
2005년 지하철 공사 과정에서 동래성 전투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에 관한 자료는 수안역 안의 '동래읍성 임진왜란역사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안역에서 충렬대로를 따라 낙민역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조선군이 왜군에 맞섰던 동래성 남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전세가 기울자 당상관의 관복인 붉은색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입고는 죽음을 준비했다
당시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왜군에 맞서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며 결사항전하였다
동래성 전투에서 남문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왜군이 동북쪽 산의 성벽을 허물고 들어왔기 때문에
관군과 함께 백성들도 맨손, 낫, 지붕 위의 기와 등으로 싸웠지만 수적 열세로 감당할 수 없었다


남문 터 표석
부산시립박물관에는 동래남문비가 있다

부산시립박물관의 복원된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
동래남문비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의 충렬을 기려 세운 비(碑)다
당시 격전지인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에 세웠던 비로 ‘동래 충렬비’라고도 한다

그 옆에 나란이 서 있는 원래의 동래남문비

동래남문비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에 처음 세웠다
1709년(숙종 35)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충렬사에 별사(別祠)를 세울 때 별사 앞뜰로 옮겼으며
1736년(영조 12) 별사가 없어지자 동래성 남문 자리로 옮겼다
1976년 시가지 도로 확장 공사로 현재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경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또한, 금강공원에는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이 있는데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에서 수많은 유골이 부러진 칼, 화살 등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에 충절의 유해를 거두어 삼성대 서쪽 구릉지에 여섯 무덤(六塚)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任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때 토지개간으로 이 유해는 동래구 복천동 뒷산 영보단(永報壇) 부근에 이장되었다가
부산시에서 1974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지금의 금강공원안으로 이장하였다
해마다 순절날인 음력 4월 15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원래의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
1972년 6년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높이 250㎝, 너비 122㎝, 두께 20㎝로
현재 비는 받침돌 위에 크게 훼손된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이다
비신 위에 얹었던 머릿돌은 옆에 따로 놓여 있다

현재 석면이 모두 떨어져 나가 글씨를 볼 수 없지만
다행히 석면이 온전할 때 탁본한 것이 남아 있어 온전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머릿돌 이수(螭首)는 비신 옆에 나란이 놓여 있는데
쌍룡이 조각된 이수 조각은 우아한 수법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복원된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
비문에는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렬하게 싸우다 순절한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를 비롯하여
비장 송봉수(宋鳳壽)·김희수(金希壽)의 순국 충절을 소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향리 송백(宋伯)·교수 노개방(盧盖邦)·유생 문덕겸(文德謙)·양통한(梁通漢)과
주민 김상(金祥)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군·관·민이 전투에 참여하여 순국한 내용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비문은 1668년(현종 9)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이제 남문 앞 해자(垓字)와 관련된 유적을 보기 위해 수안역으로 내려간다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역사관



수안역은 성벽에서 30m 남짓 떨어진 서남쪽 해자가 있던 자리다
해자(垓字)란 성밖에 물길을 파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조물이다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1452년에 설치된 동래성 해자는 기초다짐층, 조선전기층, 조선후기층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임진왜란기에 해당하는 조선전기층에서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환도, 창, 찰갑, 투구, 활, 화살촉 등등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다양한 조선군의 무기들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남성은 물론 저항할 수 없는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서도
활과 조총, 철퇴에 맞거나 창검으로 찔리고 베인 자국이 발견되었으며
화살 또는 총알이 뚫고 나간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발굴되었다
한 여성 유골은 일본도로 추정되는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으며
몇몇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턱뼈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전투가 끝난 후
왜군이 자신들이 학살한 시신과 쓸모없게 된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함께 던져 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수은갑으로 추정되는 쇠로 만든 비늘갑옷 1벌과
많은 비늘편이 출토되어 조선군의 주 갑옷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초다짐층, 조선전기층, 조선후기층 3단계로 이루어진 해자는 폭 5m, 높이 1.7~2.5m 정도이고
동쪽 석축은 깬 돌을 이용하여 13~14단 정도 올렸으며
서쪽 석축은 너비 3m, 높이 1.5m 정도로 쌓아 온천천의 범람을 막은 다음 올렸다
석축의 맨 아래에는 크고 넓적한 돌을 놓고, 그 위에 돌을 들어 올려서 안정되게 8단 이상 올렸다
이제는 수안역을 나와 암문부터 서문, 동문, 인생문, 북문까지 빙 둘러 답사를 한다

동래읍성 암문(暗門) 터는 동래구청 정문 앞 골목 안에 있다

야문(夜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암문인데도 이례적으로 은일루(隱一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일 반적인 성문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나머지 다섯 문이 닫힌 밤중에 긴요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게 한 문이다

암문 터 표석

복원되어 있는 은일루(隱一樓) 현판

서문(西門) 터 / KT 건물 인근에 위치

서문 터(西門址) 표석

서문(西門)의 복원된 심성루(心成樓) 현판

동문(東門) 터는 독립투사 박차정 의사 생가와 동래고등학교 인근 작은 도로변에 있다


동문 터(東門址) 표석

동문(東門)의 지희루(志喜樓) 현판

동래왜성 터와 인생문, 북문을 가기 위해 충렬사역에서 나와서...

동래화목타운아파트로 가는데 저기 망월산 옆에 화목타운이 보인다

충렬사 뒷문을 지나면

동래화목타운이 나오고, 102동 옆 계단을 따라 망월산으로 오른다



벤치가 있는 작은 쉼터에서부터

희미한 왜성의 흔적들이 관찰되기 시작한다

왜성 흔적 너머로 군관청 건물 지붕이 보인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은 작원관을 통해 경상도를 파죽지세로 침공해 나가고
모리 데루모토 휘하 3만여 명의 제7군은 경상도에 주둔하게 되는데
모리(毛利) 가문의 가신이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1593년 동래읍성을 허물고 그 인근에 왜성을 쌓은 것이 동래왜성(東萊倭城)이다
왜성의 중심부인 제1곽은 현재 동래읍성 동장대(東將臺)가 위치한 망월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저 군관청(軍官廳)이 위치한 곳이 제2곽로 추정되며, 그 사이에 자잘한 곡륜군(曲輪群)이 남아 있다

군관청과 동장대가 있는 망월산 쪽 충렬사 권역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닫혀 있다
산불방제기간인 5월 15일까지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군관청과 동장대는 작년에 두 번에 걸쳐 답사를 했던 아래 답사기를 참조하면 됩니다

부산 충렬사, 전등사, 망월산 동장대 : 2025. 3. 29 / 2025. 5. 19
부산 충렬사, 전등사, 망월산 동장대 : 2025. 3. 29 / 2025. 5. 19
부산에서 몇 십년을 살면서도 충렬사 답사는 이번이 처음이다부산에 산재한 소소한 유적지는 답사를 하면서도 정작 임란의 순국선열들을 모신 충렬사는 소홀하였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답사에
yncho52.tistory.com

철문 앞의 커다란 바위돌 옆의 구릉이 왜성의 흔적인듯하여...

뒷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왜성 축성의 흔적이 보인다
석축이 잘 보존되어 그 형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다른 유명한 왜성들과는 달리
동래왜성은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한 위치 및 구조를 알기 힘들어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라 한다

부산의 중심부 평야에 자리한 동래왜성은
북으로 기장왜성(죽성리 왜성: 2018.03.29 답사), 남으로 부산포왜성(증산왜성:2022.03.03 답사),
서로는 구포왜성(2024.07.04 답사)과 서로 연결되었으며 부산 지역의 주요 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 동래왜성을 거쳐 부산포왜성으로 송환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아파트 방향으로는 길게 파인 이랑형 해자(竪堀, たてぼり)를 관찰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저것이 해자 흔적인지 분명하지 않다
초목이 무성한 계절을 피해 겨울철에 와야 제대로 관찰을 할 수 있겠다

학산여자중고등학교를 지나면

북문과 북장대가 있는 마안산(馬鞍山)이 보이고

복천동 고분군도 보인다

이제 인생문이 나온다


인생문(人生門)은 동래읍성의 소문(小門)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문이라 하여
인생문(人生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은 조선 후기 읍성의 1/6 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재 인생문 고개라 불리는 곳은 성곽이 지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 개건(改建)할 때 원형과는 전혀 다르게 복원하였으며
위치도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원위치가 아닌 북쪽으로 약 10m 옮겨 개건하였다고 한다

북문(北門)
이름이 따로 없는 이 문은 현판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북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장대와 북장대 부근까지 동래읍성의 체성이 복원되어 있는 구간인데
원형의 성벽을 거의 찾아보기는 힘들고 현대식으로 반듯하게 쌓아올렸다는 비판이 있다고 한다

옹성의 형태가 굉장히 특이하여
보통 180도를 두르는 다른 옹성들에 비해 이곳은 90도 가량밖에 둘러져 있지 않아서
일반적인 반원형과 구별지어 '호형(弧形) 옹성'이라고도 부른다

북문 바깥쪽

북문과 옹성
동래읍성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아래 답사기를 참조하면 됩니다

동래읍성 문화기행 1) : 2016. 12. 27
동래향교(東萊鄕校)엊그제인 12월 25일 배산을 등산하고 연산동 쪽으로 하산을 하면서 '연산동 고분군'을 보았는데이런 고분이 연산동에 있다는 것을 그동안 누구한테서도 들어도 본 적이 없었
yncho52.tistory.com
동래읍성 문화기행 2) : 2016. 12. 27
보수공사 중인 인생문(人生門) 인생문이 공사 중이라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길을 따라 200m 정도 내려가다가복천동 고분과 박물관으로 가는 다른 입구가 있어 그곳을 통해 고분으로 향한다 복천
yncho52.tistory.com
'여행사진 > 여행사진(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부산 동구 근대산업유산길 일부(안용복장군 생가 터, 왜관 터, 영가대 터, 윤흥신장군 동상) : 2026. 6. 25. (1) | 2026.06.25 |
|---|---|
|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 2026. 3. 21. (0) | 2026.03.22 |
| 의령 일붕사 : 2026. 3. 21. (0) | 2026.03.22 |
| 동래고읍성 : 2025. 9. 3. (1) | 2025.09.03 |
| 온천장 전차거리 : 2025. 4. 7. (0) | 2025.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