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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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 정현덕 발자취를 따라서 : 2022. 10. 20

딜라일라 2022. 10. 20. 15:39

 

범어사 숲속둘레길의  금어동천(金魚洞天) 암각 바위

바위 정면에는 바위면에 커다란 글씨로 金魚洞天이라고 새겨져 있다

 왼쪽 옆의 김철균(金澈均)라는 이름은 金魚洞天 글자를 음각한 사람의 이름이다

 

 

바위 오른쪽에는 동래부사를 지낸  정현덕(鄭顯德)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동래지역의 사적지 곳곳에서 동래부사 정현덕의 발자취를 자주 보게 되는데

동래부사 정현덕(1810~1883)은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1867년(고종4년)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1874년(고종 11) 1월 이임하였는데

평균 재임기간이 2년 정도인 다른 부사들과는 달리 약7년간의 오랜 재임기간 동안

고을 수령으로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여러가지 공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교학(敎學)을 진흥시켜 동래 땅을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맹자의 고향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동래읍성을 개축하고 독진대아문도 중수하였을 뿐만아니라

금정산성의 동문과 서문을 재건하기도 하였다

 

동래 향교 안에는 정현덕 흥학비(興學碑)가 있고

이곳 범어사 숲속둘레길 입구를 비롯하여 금정산성 금성동의 국청사 입구와

낙동강 황산잔도길에는 정현덕 영세불망비(永世不亡碑)가 있으며

동래 칠산동에 태평원 시비(太平園詩碑) 금강공원 내에 금강원 시비(金剛園詩碑)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권세를 잃자 정현덕도 파직을 당해 귀양을 갔고 대원군이 재집권 한 뒤에는 복귀하여 형조참판에 올랐으나

대원군이 다시 쫓겨나면서 사람이 살기 힘든 외딴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참에 동래부사 정현덕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과 경남의 이곳저곳을 답사하면서

수집해왔던 자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다

 

 

 

 

범어사 숲속둘레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면 영세불망비를 모셔둔 영사단(永思壇)이 나오는데

왼쪽부터, 통정대부참서관장공호진영세불망비(通政大夫參書官張公浩鎭永世不忘碑,1903),

부백정공헌교영혁폐막만세불망단(府伯鄭公獻敎永革弊瘼萬世不忘壇,1860),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曮革祛寺弊永世不忘壇,1808),

순상국홍공우길혁고막만세불망단(巡相國洪公祐吉永革痼瘼萬世不忘壇,1860),

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1872)가 소목지서(昭穆之序)로 배치되어 있다

 

소목지서(昭穆之序)에서 소(昭)는 동쪽이고, 목(穆)은 서쪽인데

제일 웃어른을 가운데 모시고 중앙을 상석으로 하고

소(昭)에 2위인 고조, 목(穆)에 3위인 증조, 다시 소에 4위인 조부, 목에 5위인 부모를 모시는 순서를 말한다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국청사(國淸寺)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金井山)의 금정산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국청사(國淸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소속의 사찰로서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조선 숙종 29, 금정산성 축조와 함께 중수하여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청정히 보호하므로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칭하고 순조 26년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연못을 먼저 만나게 된다

 200평 가량 되는 이 연못 가운데는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1982년 조성된 호국 지장보살본원 삼층석탑이다

 
 

연못 옆에는 가운데에 지장보살 입상과 함께 왼쪽에는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본원 삼층석탑을 조성한 경위와 시주자의 명단 등을 기록한 비가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

이 비석은 본래 국청사의 중건과 선정을 행한 동래부사 정현덕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872년 국청사에 주석하던 명신(), 평윤(平允) 스님에 의해 국청사 입구에 세워졌다

정현덕은 1867(고종 4)에 부임해 6년여 동안 동래읍성 수축과 군사조련 등 유사시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또한 일본을 견제하며 호국의 얼이 서린 국청사에 토지를 희사하고 사찰을 중건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말기의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는데

이치영이 글씨를 쓴 이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높이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비석 앞면에는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음각 되어 있고 좌우편에 4언시가 남아 있다

 

相鄕趾美(상향지미) 重建佛宇(중건불우) 逢海宣恩(봉해선은) 廣置寺屯(광치사둔)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미풍전통을 이어받아 불교사찰을 중건하고

동래에 은혜를 베풀어 사찰에 많은 땅을 희사하였다

 

 

 

 

동래에서 물금, 원동, 삼랑진, 밀양으로 가는 길이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황산도(黃山道)다

물금과 원동 사이에는 오봉산의 지산인 높은 화제고개가 있어 둘러가려면 시간과 힘이 많이 들었고

거기에다가 산적까지 자주 출몰하여 위험하였다

그래서 낙동강 위의 산허리 벼랑을 깎아 내어서 선반과 같은 길을 낸 것이 황산잔도(黃山棧道)다

영남대로의 3대 잔도라 하면 황산잔도, 작원잔도(삼랑진), 관갑천잔도(문경)다

황산잔도는 위험해서 주막에서 한잔 걸치고 과거보러 가던 선비나 상인들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황산잔도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낙동강 황산잔도길의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鄭顯德 永世不忘碑)

 

 

 

 

동래 향교(鄕校)

 

 

향교 앞의 下馬碑

 

 

향교 안에 모셔둔  역대 동래부사들의 치적을 칭송하는 흥학비(興學碑)

(화살표가 정현덕의 흥학비)

 

 

향교(鄕校)인지라 흔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나 거사비(去思碑)들 대신 모두 흥학비(興學碑)들 뿐이다

 

부사 정현덕 흥학비(鄭顯德  興學碑)

동래부사 정현덕은 재임 동안 교학(敎學)을 진흥시켜

동래 땅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인 공자.맹자의 고향처럼 만들고자 하였다는데

그에 대한 칭송의 송덕비를 이곳 향교에 흥학비로 건립하지 않았을까

 

 

 

 

금강공원(金剛公園)

 

 

금강원 시비가 있는 옛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이 있던 자리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인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은  그동안 금강공원 안 연못 근처에 있었으나

원래의 자리를 찾아 2014년 8월에 동래부 동헌 마당으로 이전을 하였다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의 금강원 시비(金剛園 詩碑)

시의 내용을 보면 동래부는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워 마치 전설 속의 태평성대와 같다고 찬탄한다

더불어 옛 목민관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임금의 은혜를 되새기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옥피리와 매화꽃을 감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는 임금의 은혜에 걸맞은 정치를 펴는 목민관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생을 여유롭게 바라볼 줄 아는 정현덕의 풍모를 보여 준다

 

 

정묘지년아마동(丁卯之年我馬東) 정묘년(1867, 고종 4)에 내가 말을 타고 동래로 오니

차방민물견번웅(此邦民物見繁雄) 이 고을 백성과 물자가 번성하구나

거인진유승평락(居人盡有昇平樂) 주민 모두 태평 시절을 즐기고 있지만

수수무한폐공(守殊無捍蔽功) 늙은 태수 자리만 지켜 특별한 공적이 없네

홍우지대가선월(紅藕池臺歌扇月) 붉은 연못 정자에 부채 부치며 달을 노래하고

녹양성곽주기풍(綠楊城郭酒旗風) 푸른 버들 성곽에 술집 깃발 날리우네

계림고사의연재(鷄林古事依然在) 계림의 옛이야기 의연히 남아 있어

만만파파일적중(萬萬波波一篴中) 만파식적 소리 아직도 한 피리 속에 들리네

월절고성대해빈(越絶高城大海濱) 큰 바닷가 유난히 높은 성

백계연화정변진(百季煙火靜邊塵) 백년토록 변진 봉화 고요하여라

조정이아위민목(朝廷以我爲民牧) 조정에선 나를 목민관으로 삼았지만

정적여하사고인(政績如何似古人) 치적이야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 있나

감도포편능화위(敢道蒲鞭能化僞) 감히 부들 채찍으로 거짓을 교화한다 말하리

수언훼복여위린(羞言卉服與爲隣) 오랑캐와 더불어 이웃한다 말하기 부끄러워라

군은미보신공로(君恩未報身空老) 임금의 은혜 갚지 못한 채 몸만 헛되이 늙고

옥적매화우송춘(玉篴梅花又送春) 옥피리와 매화꽃 속에서 또 봄을 보내는구나

 

 

 

 

동래유치원 (동래구 칠산동 246번지)

 

 

동래유치원은 동래기영회가 운영하고 있다

 

 

이곳 동래유치원은 옛 상춘정이 있었던 자리다

상춘정(賞春亭)은 부산 동래 지역 유지들의 친목 단체인 기영회(耆英會)에서

세운 정자로 일명 회심정(會心亭)이라고도 불렀다

상춘정 자리는 도화동천(桃花東天·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라 불리던 곳으로

옛 동래부사와 지역 선비들이 봄맞이를 하거나 시를 짓곤 하던 곳인데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942 지금의 동래구청 부근에 있던 동래유치원이 옮겨 오면서

상춘정은 철거되었고 현재는 동래기영회에서 동래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바로 위에는 옛 학소대(鶴巢臺) 자리인데 지금은 법륜사(法輪寺)가 자리잡고 있다

일제 시대에 일인들이 학소대에 신사를 지으려 하자

동래기영회장과 범어사 주지가 이곳에 포교당(법륜사)를 먼저 지었다고 하는 곳이다

 

동래 상춘정 터에는 동래부사 정현덕의 태평원 시비를 비롯하여

동래부사 민영훈의 생사비를 포함한 2기의 생사비와  3기의 거사비가 있고

봉호복정(蓬壺福庭)이라는 돌기둥 등 여러가지 유적들이 있다

 
 

참고로, 동래기영회(東來耆英會)는 

1846(헌종 12) 3월 동래부에 거주하던 50세 이상의 노인 40명이

동래 학소대(鶴巢臺) 아래 윤언서(尹彦瑞) 집에 모여 기영계(耆英稧)라는 친목 시회(詩會)를 만들었다

1883(고종 20)1897(광무 1)에는 동래 부사가 모임에 가입함으로써

기영회는 동래 지역의 대표적인 모임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1963년 재단 법인 동래기영회가 발족되었고 1970년 동래유치원을 인수하였다

1985년에는 동래문화회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약 170년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봉호복정(蓬壺福庭)

 복스러운 정원이라는 뜻의 봉호복정이라는 한자가 새겨 진 돌기둥은

동래기영회 회원들과 동래부사들이 모여 시회를 열던 곳의 유물이지만 지금은 방치되어 반쯤 흙속에 파묻혀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의  태평원 시비(太平園 詩碑)

태평원(太平園)은 현 동래중학교 앞 쌍용예가 자리에 있던 곳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죄수를 사형시키던 곳이라 한다

이 비석은 한말에 부사 정현덕이 쓴 시를 새겨 태평원 안의 군사훈련장으로 쓰이던 만년대 자리에 있던 것을

1955년 동래기영회에서 현 위치인 동래유치 원으로 옮겨 두었다고 한다

 

태평교 다리 아래 태평원에는 정원의 풀과 꽃이 날로 무성해지네

돌 위엔 큰 글자 셋 새로이 새기었고 길 가에선 한 지방 얘기 많이도 듣는 다네

멀리 가는 수레도 변방이 괴롭지 않으니 농사꾼도 모두 임금의 은혜를 아네

촌 늙은이 살펴보니 머리는 눈 같은데 느릅나무 우거진 곳에서 손자 아이와 유희하네

태평원 안의 만년대에는 도호부사가 외영(外營)을 물 가에 열었네

경치 좋은 곳에 아지랑이와 안개 쉽게 거느리고 언덕 둘러 꽃나무도 손수 새로 심었다

젊은 학생 풍류거리 잘도 만들고 젊고 경험이 적은 이는 장수의 재질 아니라네

요즈음 변방에는 놀랄 일 별로 없어 그림 다리에 앉아 달구경 하고 밤 깊어 돌아오네

만년대 밑의 만년교에는 물길에 걸친 긴 무지개 그림자 흔들리니

방초(芳艸)된 맑은 시내에 술잔 씻는 것 바라보고  녹음진 밝은 달에 퉁소를 불게 하네

자주 푸른 장막 열어 관가 길 바라보지만 어찌 검은 두건 눌러 쓰고 군의 조회에 누우리오

길가는 행인들아 괴이하게 생각 말아라  요사이 일이 없어 날마다 소요한단다

 
 
 

동래읍성 둘레길에 있는 태평원 시비 안내판

 

 

상춘정(賞春亭) 터 기념비

 

 

2기의 생사비(生祠碑) 3기의 거사비(去思碑)가 있는데, 동래성 안에 흩어져 있던 비를 모은 것이다

좌(左)로부터, 부사 민영훈 생사비, 부사 윤필병 거사단, 부사 강필리 거사단

부사 한배하 거사단, 부사 이항 생사비

 

 

 

부사 민영훈 생사비(府使 閔永勳 生祠碑)

 

금정구 부곡동의 공수물공원에는 동래부사 민영훈 거사비(閔永勳 去思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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