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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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선비길 : 2019. 8. 8.

딜라일라 2019. 8. 8. 23:39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에서 안의면 금천리 광풍루까지

화림동 계곡을 따라 함양군에서 조성한 약10.6km의 '선비길' 답사를 나선다

함양군에 의하면 함양에는 86개의 누각정자와 62개의 충효열녀비가 있고, 향교서원이 12개나 있다고 하는데

오늘의 이 코스는 8개의 정자와 1개의 누각을 지나게 된다


사상터미널에서 7시 정각에 출발한 함양행 직통버스는

1시간 45분 걸려 8시45분에 함양터미널에 도착을 한다 (요금 11,800원)


부산으로 돌아 갈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난 뒤


인근에 있는 군내버스터미널에서 서상행 버스를 탄다


마침 9시 정각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서상행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는데 요금은 1천원이다


군내버스는 안의정류장에서 약10분 가량 승객을 기다리느라 지체를 하였음에도

 9시45분에 서하면 봉전리에 도착을 한다


선비길 트래킹은 거연정에서 시작된다

거연정 입구 화림재 앞의 '화림재 전공 유적비' (花林齋全公遺蹟碑)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 선생이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건립했으며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자 이듬해 복구 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자
1872년 화림재선생의 7대손인 전재학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정자(거연정)를 재건립하였으며 1901년 중수 되었다


화림재(花林齋)



화림교를 건너 저기 거연정이 모습을 보인다



거연정(居然亭)

'자연이 머문다'는 뜻의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울창한 숲을 병풍처럼 두른 화강암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누군가가 바위면에 訪隨川이라고 새겨 놓았다

찾을 訪, 따를 隨, 내키는대로 隨이니 언제든지 찾고싶은 계곡이라는 뜻인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전씨 성을 가진 이름이 둘이나 보인다

혹시 화림재 전시서 선생의 자손들인가




거연정 옆 화림교 다리 아래의 담(潭)은 물이 얼마나 깊은지 짙은 녹색을 띠고 있다

지난 2007년 8월 백양산악회에서 거망산-황석산을 타고  봉전마을로 하산을 했을 때

이 거연정 옆 암반 사이에서 권우혁과 멱을 감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젊은아이들 몇몇이 다리위에서 저 물속으로 뛰어 내리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정자 안에는 선인들의 무수한 시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온전히 잘 모르지만 후일을 위해 모든 시판들을 카메라에 담아둔다













2007년 8월 한여름,  권우혁과 멱을 감았던 장소


뒷쪽에서 바라본 거연정 전경


거연정에서 올려다 보이는 화림재


함양 안의에는 안의3동이라는 산세와 경관이 뛰어난 계곡 세 곳이 있는데

용추계곡이라 불리는 심진동(尋眞洞) 계곡과 거창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猿鶴洞) 계곡

그리고, 이 화림동(花林洞) 계곡이 있다

또, 삼가승경(三佳勝景)으로 심진동의 심원정(尋源亭), 원학동의 수승대(搜勝坮),

그리고,  화림동의 농월정(弄月亭)을 꼽는다


이제 거연정 바로 인근에 있는 군자정을 답사하러 간다



군자정(君子亭)

조선시대 5현 중 한명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선생을 기리기 위해

화림재 전시서 공의 5대손인 전세걸이 1802년 지은 정자로 군자(정여창)가 머무르던 곳이라하여 군자정이라 이름 지었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정여창의 처가가 이곳에 있어 처가에 들릴 때면 자주 찾았다는 계곡가에 지었는데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인 '일두 고택'이 있다

거연정을 1872년 건립하였으니 거연정보다 70년이나 앞서 지었지만

거연정만큼 아기자기한 맛은 없고 소박하면서도 단출한 모습이다



군자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계곡

나무에 가려져 조망이 그리 시원스럽지는 않다


군자정의 여러 시판도 카메라에 담아 둔다






군자정에서 영귀정으로 가는 도중 봉전교 위에서 왼쪽 계곡 건너편에 보이는 거연정

수필가 이효준은 이 거연정을 바위와 담, 노송의 3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는

한 폭의 빼어난 산수화라고 극찬을 했다

 

봉전교 다리 위에서는 왼쪽의 군자정과 오른쪽의 영귀정이 다 보이는 위치인데

두 정자 모두 숲에 가리어져 잘 보이지 않는다



계곡 너머에는 암반 위에 서 있는 군자정이 보이고


가까이 당겨보는 군자정


영귀정(詠歸亭)


귀거래사를 읊는다는 뜻의 영귀정은 개인사유지 안에 있어

정자 앞으로 내려가서 전면을 바라볼 수는 없게 울타리로 막아 두었다


영귀정이 있는 개인사유지에는 법당 같은 한옥 한 채가 영귀정 옆에 있고

잘 손질된 잔디와 정원수로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다

 

이제 여정은 동호정을 햔한다





함양군에서는 선비문화 탐방로를 정성들여 잘 조성해 두었다



동호정(東湖亭)

1895년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화림동계곡에 세워진 정자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동호정 앞의 넓은 반석인 차일암(遮日岩)

사람 수십~수백 명이 모여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다

 

동호정과 차일암


탐사로에서 동호정으로 건너 가는 징검다리




차일암에 누군가가 거문고 琴, 피리 笛자를 써서 금적암이라고 새겨 놓았다


동호정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을 했다는 조선 선조 때의 학자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

관직에 오르기전 고향인 서하면 황산마을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영(遊泳)하였던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0년 경에 지었다



동호정은 화려한 정자 안의 단청과는 달리


정자를 받치고 있는 나무기둥은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한 원목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를 물씬 풍기고


계단도 통나무를 깎아내어 홈을 만들어 투박한 모습 그대로 이용을 하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삼척 죽서루의 기둥들이 자연암반을 다듬지않고 생긴모습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한 탓에

기둥들의 길이가 모두 서로 다르듯이..........

 

동호정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단청 모습





동호정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차일암

그 옛적 선비들이 시원한 청정수에 탁족을 하면서 모여앉아 시문을 읽고

그러다가 흥이 취하면 저 넓은 바위 위에서 기생들과 더불어 거문고와 피리, 장구 장단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였을 모습이 떠오른다


동호정 오른쪽 저 멀리 범상치 않은 모습의 높은 산이 있어

인근 산장의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지역주민들은 대봉산이라고 부르는 괘관산이라고 한다


괘관산(掛冠山: 1254m)

지난 2014년 7월에 오른 적이 있는 저 괘관산은 '갓걸이산'을 한자로 치환하면서 괘관산이 되었는데

온 세상이 물바다를 이룬 천지개벽 때 이 산 정상에 갓을 걸어놓을 만큼의 공간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고 하는 전설로

삼천포 와룡산의 새섬봉 전설과 비슷하다


차일암 옆의 소나무 숲


경모정과 람천정을 향해 호성마을회관을 지나고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의 이런 길도 지난다



경모정(景慕亭)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무열공 배현경(裵玄慶) 선생의 후손인

계은 배상매(裵尙梅)공이 조선 영조 때 산청에서 이곳 함양 서하면 호성마을로 이사를 와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8년 최근세기에 지은 정자다









람천정(藍川亭)

'쪽 藍'자를 쓴 것을 보니 쪽빛처럼 푸른 계곡을 내려다 보는 정자라고 해야 하나?

주변에 안내판이 없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람천정 앞의 쪽빛(?) 계곡수


정자 앞의 계곡이 탁 틔여서 조망이 아주 좋다


계곡에서 쳐다보이는 람천정







저기 황암사가 보인다

황암사 뒤로 보이는 높은 산은 황암사의 존재이유가 있는 황석산(黃石山)일 것이다


줌으로 당겨 본 황석산

저 황석산에는 황석산성이 있고 주위에 피바위라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민관군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도 황석산 북쪽 바위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아픈 역사가 있다

  2007년 8월 산행 시 아직도 붉은 빛을 띠고 있는 피바위 절벽을 건너다 보면서 잠시 숙연해진 기억이 있다

 

황암사(黃巖祠)

황암사는 그 정유재란 당시에 황석산 전투에서 순국한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암사 사당


황암사 의총


황암사 참배를 마치고  이제 농월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농월정(弄月亭)

월연(月淵)에 비친 달을 희롱하며 즐기는 정자라는 농월정이

1천여 평에 달하는 넓은 반석인 달바위(月淵岩)를 앞에 두고 고고히 서 있다

 

원래 저 자리에 있던 농월정은 지난 2003년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2016년에 지금의 저 모습으로 다시 복원이 된 것이다


농월정(弄月亭)은 심진동 계곡의 심원정(尋源亭), 원학동 계곡의 수승대(搜勝坮)와 함께

안의(安義)의 삼가승경(三佳勝景)중의 하나로 꼽힌다


농월정은 이곳 출신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참판이던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지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과 대척점에 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창하였던 인물이다

2017년 10월에 개봉하였던 영화 '남한산성'에 보면

주화파 최명길에는 이병헌이 역을 맡았고, 척화파 김상헌에는 김윤석이 역을 맡아 열연을 했다


지족당 선생  안의의 큰 인물이네

양난에 나아가 나라 위해 일했고

노년에 달을 벗삼아 영월했네

세상 시끄러워도 산천은 무심히 아름답네  (이양훈)

註) 양난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암반 사이를 흐르는 물살이 제법 거세다

글을 정리하다보니 며칠 전인 8월 3일에

이 농월정 앞 계곡에서 물놀이 하던 81세의 노인이 물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지금 이곳 어디에도 그런 사고가 있었는지 긴장감은 조금도 느낄 수 없이 무척 평온하기만 하였다

  

창랑지수청혜(滄浪之水靑兮) 가이탁오영(可以濯吾纓)

창랑지수탁혜(滄浪之水濁兮) 가이탁오족(可以濯吾足)

"창량의 물이 맑음이여  나의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림이여  나의 발을 씻으리라"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고사로

 치세 때는 나아가 벼슬을 하고, 난세 때에는 물러나 은거한다는 뜻이다)



농월정 인근의 농월정국민관광단지에는 단체 관광객들로 인해 북적거린다




이제 농월정을 떠나 안의로 향해 가는데 도중에 구로정이 있다




농월정에서 농로를 따라 1.3km쯤 걸으면 월림마을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계속 진행을 한다


다리 끝의 월림마을회관을 지나고


구로정을 향해 길을 잇는다


저 길은 솔숲쉼터로 가는 길인데

보기만해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솔숲 속에는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쉬고 있다


이제 저기 길 앞에 조그만 정자가 보이는데.....


구로정(九老亭)이다

이곳 월림리 성북마을에 살던 아홉 노인들이 계를 조직하여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1955년에 그 자손들이 건립한 정자로 아담한 규모다

난간과 정자 바닥은 최근에 새로 전면 개수를 하였는지 풋풋한 나무냄새가 나고 있었다




구로정의 역사와 함께


아홉 노인들의 이력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구로정 앞의 풍광



구로정을 떠나 안의로 가는데  안의 시내가 가까운지 길이 넓어지고 주변의 집들도 많이 보인다

 

잔디마당과 조경수가 멋진 어느 주택




그늘을 찾아 다리 아래에서 여가를 줄기고 있는 어느 가족의 모습이 부럽다


관북마을회관을 지나고


오리숲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다슬기를 잡고 있는 저 남자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여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는데

다슬기잡이에 열중한 채 한 눈도 팔지 않는다


안의 오리숲

안의면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천변의 오리숲은

옛날에는 아까 지나온 월림마을회관이 있던 월림리의 밤숲에서부터

여기 교북리 앞까지 五里(약2km) 길이로 물버들나무가 군락을 이룬 긴 숲이었는데

지금은 교북리 일부분만 남아 있다

지금은 새로운 환경조성을 위해 중장비로 공사 중이어서 숲속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할뿐더러

하천 바닥을 뒤엎어 놓아 물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숲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도 없어 아쉽다


<참고사진 : 펌>

안타까움에 수량이 풍부할 때의 사진인 남의 사진을 빌려본다


오리숲 옆에는 각종 선정비를 한곳에 모아둔 곳이 있는데

안의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를 이곳으로 한데 모아서 보존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광풍루 뒷쪽으로 옮기기 위해 곧 이전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조 때의 안의현은 지금의 거창군 일부(마리면, 위천면, 북상면)도 포함하고 있었으나

1914년에 함양군 안의면으로 축소되었다



조선 태종 때는 안음현(安陰縣)이었으나 영조 때 안의현(安義縣)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4년이던 1728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안의의 정희량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하여 참수된 뒤 영조는 안의현을 함양과 거창에 분속시켰고

그후 1914년 일제에 의해 지금의 안의면이 설치되기 전까지 그 이름을 잃어버렸다



안의대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오리숲

최근 장마와 태풍으로 많은 비가 내렸는데도 이 금천의 수량은 그리 풍부하지가 않다

공사를 위해 윗쪽에 물막이를 해 두었나?

 


이제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광풍루가 보인다



광풍루는 안의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풍루(光風樓)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우람한 팔작지붕 누각으로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지은 누각으로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으나

1494년(성종 25년)에 안의현감으로 재직했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한 뒤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광풍루를 마지막으로 답사하고 안의초등학교로 가는 길에

안의면사무소를 지나고


안의파출소 건너편에

커다란 노거수와 함께 특이한 형태의 일주문과 종각이 있는 사찰(法印寺)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냥 펑범한 절집이었다


안의초등학교는 안의파출소와 안의소방서 옆에 위치해 있는데

1912년 4월 안의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이후, 2019년 2월 제105회 졸업생을 배출한 유서깊은 학교다


안의초등학교는 옛날 안의현청의 부속건물이 있던 자리로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가 있어 그 사적비를 보기 위해서 찾았는데


교정 한 쪽에 있는 세 그루의 플러터너스 고목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가까이 가서 팔을 벌려보니 장정 두 사람이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놀랍다

이 학교 동문들에게 이 플러터너스는 자랑스러운 모교의 역사를 한마디로 함축하는 것이리라


교사 앞 화단에 1986년 세워진 '연암박지원선생사적비'가 있다



'열하일기'라는 불세출의 견문록을 남긴 조선후기 실학파의 거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55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간 재직하면서 이 고장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먼저 이곳에 있으면서 지은 문집인 燕巖集에 수록된 40여편의 저작활동을 통해 이 고장을 빛냈고

북경에서 체득한 실학지식으로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을 만들어 농업생산에 활용토록 하였고

벽돌 만드는 기술도 전수하여 관아의 부속건물과 연지(蓮池)도 만들었고

민생치세에 힘을 기울여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며

상습수해지역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았고 옥사(獄事)의 판결에 神明하여 어려운 옥사를 여러 건 해결하였으며

이 고장의 문화와 禮俗을 존중하여 지방의 문헌을 발굴하고 학술을 진작하여 훌륭한 지방문화를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안의초등학교의 사적비까지 답사를 마치니 시간은 오후 2시 15분이다

안의면에서 북쪽으로 용추자연휴양림이 있는 용추계곡(안의3동의 하나인 심진동 계곡) 입구의 용추폭포로 가는 길에

 '연암 물레방아공원'이 있는데 거리는 약6km로 버스로 35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거기로 가는 버스가 1시간마다 있다고해서 포기를 한다


함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직통버스가 오후4시에 있는데

이곳 안의에서 함양가는 군내버스가 3시에 있다(30분 간격)

안의에서 함양까지 30분 정도 걸리니 3시 군내버스를 타면 시간이 맞다

 

지금 2시15분이니 군내버스 시간인 3시까지는 시간여유도 있고

점심이라고 작은 크로아상 빵 세 조각만 먹었던지라 시장기도 있다

안의에는 소갈비탕과 소갈비찜이 유명하다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수는 없다

버스정류장 앞에 갈비탕 식당이 여러 집이 보이는데 원조라는 간판에 이끌려 이 식당으로 들어선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겠는가

 

메뉴판을 보니 갈비탕 한 그릇에 1만4천원이나 한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리를 잡고 호기롭게 막걸리 한 병까지 주문을 한다

(나는 갈비탕 한 그릇에 돈 만원이나 비싸야 1만2천원 정도 하겠지 했는데.....)



갈비는 이것들 세 조각 뿐이었지만 국물맛은 담백하니 먹을만 했고

땀에 찌들은 옷을 갈아입고 막걸리 한 잔을 넘기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

문득 수년 전 해운대에서 안의갈비찜이라는 식당을 했던 초등학교 여자동기의 갈비찜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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