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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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관광(端宗 哀史를 따라) : 2011. 5. 1.

딜라일라 2018. 1. 11. 19:47


어제(4월 30일) 단종문화제에 참석하려고 한달전부터 벼루었는데

 천둥폭우로  행사자체가 어려울것 같아 포기하고,  이튿날인 오늘 영월 鷄足山 산행 후

  옛날부터 꼭 가서 참배하고 싶었던 단종이 잠들어 있는 이곳 장릉(莊陵) 을 찾았다
















한식날 장릉에 제사를 올릴때면 물이 많이 고인다고 하는데

단종의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릉(莊陵)

 

열두살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조선 6대임금 단종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조1년 상왕으로 물러나 이듬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세조3년 1457년 6월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로 인해 2달만에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기어 지내던 중

 성삼문 등 6명의 충신이 단종의 복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후,  

결국 그해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감한 비운의 왕이다

이후 241년이 지난 숙종24년(1698년) 11월 6일 마침내 노산대군(魯山大君)에서

 단종으로  복위되고 능호도 노릉(魯陵)에서 장릉(莊陵)으로 추복되었고

 장릉은 1970년 5월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檀)을 설치하였다
장릉에는 문관석 두개만 있을 뿐 무관석은 없는데

 단종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종이 승하한 후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영월호장 엄흥도 였다

세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는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지금의 장릉)에 모셨다

(또다른 설은 영월 야산에 암장되었던 것을 중종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궁중에서 추방당하여 한양 교외의 초막에서

 동냥과 염색업으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고 하는데,

그녀의 통곡이 들려오면 마을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낙촌비각

엄흥도 부자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어 매장된 뒤 84년 후에

 영원군수 박충원이 단종의 무덤을 찾아낸다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

 어찌된 영문인지  보덕사 포교당으로 같이 쓰이고 있었다

 세조3년 1457년 8월 홍수때문에 거처를 청령포에서   영월읍내 관풍헌으로 옮긴 단종은

그해 10월 24일 이곳 관풍헌 자규루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곳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800미터쯤 가면 동강변에  단종을 모시던 시녀6명이

강물에 몸을 던진 낙화암이 있다



자규루

 

한쪽은  매죽루(梅竹樓)라 쓰여있다

 단종이 이곳 객사에서 거처할 때 이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子規詞 및 子規詩로 읆은 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子規樓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길 바깥에서 보이는 자규루

 

관풍헌이 정사각형이 아니고 일부를 상가가 점유하고 있어

도로쪽으로 들쭉날쭉 기형을 이루고 있는데

아마도 영월군에서 토지 매수를 하여 옛날의 원형을 보존하려고 한창 진행중으로 보인다

지금은 단종이 생을 마감한 자리라는 역사적 장소에 비하여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안내문이나 유적지 관리가 실로 엉망이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온전한  옛모습으로 복원된 후의 관풍헌을 다시 보고 싶다

(관풍헌은 또, 김삿갓이 이곳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다는 역사도 안고 있는 곳이다)


이쪽에는  자규루(子規樓)라고 쓰여있다
원래 매죽루였지만 이곳에서 단종이 직접 지은 시 子規詩를 자주 읊었다고 해서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 

'원통한 새가 되어 제 궁을 나오니 짝 잃은 그림과 꿈은 산중이로구나

밤마다 틈을 내어 잠을 들려고 해도 잠은 오지않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원한 맺힌 그 한 자규새 소리 멎고 조각달이 밝은데

피눈물 흐르고 꽃송이 떨어져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애소를 못 듣는데 어찌하여 수심 많은 내 귀에만 들리느냐'


어제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있어 청령포로 건너는 배는 오늘 운행하지 않는단다


청령포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2달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동.서.북 삼면은 서강에, 남쪽은 깍아지른 절벽에 막힌  청령포는 고도와 다름없는 곳이다

서강을 건너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약을 들고왔던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비이다

세조의 명을 받은 그는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곳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놓다'

 

청령포를 휘감고 있는 서강은 손을 담그기만 해도 파란 물이 들 정도로 검푸르다


단종이 거처하던 곳은 울창한 송림에 파묻혀 있다

이 가운데 觀音松이 있는데 단종의 한맺힌 모습을 보고(觀) 듣고(音) 했다고 해서

관음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 소나무는 그 자태도 아름답다고 한다

(청령포는 다음에 다시 답사를 할 예정이다)


선돌 : 영월읍 방절리 산 122번지 소재



주차장에서 약100m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두갈래의 우뚝 솟아있는 높이70m 바위를 선돌(立石)이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서강의 푸른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하여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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