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유유자적(悠悠自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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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폭포 : 2013. 11. 13 이태성, 김병환과 함께

딜라일라 2018. 1. 12. 22:33

 

하동 칠불사 인근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에 같이 가자는 이태성 군의 권유에 김병환 군과 함께 따라 나섰다

 

 

화개장터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단편소설 '역마'의 무대다

 

 

지리산 북쪽의 함양 사람들도 벽소령을 넘어 이곳으로 장을 보러 왔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화개는 조선7대 시장의 하나였을 정도로 번성하였고

1일과 6일인 화개 장날을 중심으로 부근 지방의 장날이 전해졌다고 한다

잊혀져 가던 화개의 아련한 향수를 새삼 국민들에게 불어일으키게 한 것이

가수 조영남이 부른 노래 '화개장터'였다

 

 

 

칠불사 일주문

 

 

 

 

칠불사(七佛寺)   영지(影池)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나 출가한 몸이라 상면할 수가 없어

절 밑에 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에 비치는 왕자들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갔다는 연못이다

허왕후는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는데

장남은 수로왕에 이어 가야(금관가야)의 2대 거등왕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 아들에게는 허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들은 칠불사에서 성불하여 일본에 가서 제2의 가야 왕국을 건국하였다

 

 

 

 

천년고찰 칠불사(七佛寺)는 1948년 12월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시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이 칠불사를 필두로 연곡사, 법계사, 대원사, 금대암, 영원사, 벽송사 등 지리산 골짜기의 수많은 사찰들이

 이미 6.25전쟁 이전에 토벌군과 빨치산 간의 전투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 번 불을 지피면 겨울 한철이 따뜻했다는 천년 온돌방이었다는 아자방(亞字房)
이중 온돌구조로 된 이 건물은 세계건축대사전에 등록된 문화유산이다

 

 

 

 

 

七佛寺는 천태산의 父恩庵, 무척산의 母恩庵,  불모산의 長遊寺와 함께

가락국의 전설이 서려있는 암자이다

 

 

 

칠불사 관광을 마치고 쌍계사 입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1인분에 1만오천원이나 하는 '참게간장게장'이 너무 짜서 제대로 먹지를 못할 정도였다

 

 

 

점심을 먹고 이제 쌍계사와 불일폭포로 발걸음을 옮긴다

 

 

쌍계사 입구 석문

 

 

 

 

 

입산시간 지정제에 쫒겨 쌍계사 관람은 뒤로하고 먼저 불일폭포부터 다녀 오기로 하였다



 

환학대 (喚鶴臺)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 은거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바위란다

 

 

 

 

마족대 (馬足臺)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 때 생긴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설화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불일평전

40년만에 다시 와보니 옛날엔 밭이었던 자리는 야영지로 바꾸어 있었고 .....

 

 

그때 한 부부가 살던  이곳은 휴게소와 탐방지원센터로 바뀌어 있었다

 

 

 

1974년 왔을 당시의 옛날 집터에는 아직도 집이 남아 있지만 그때의 그 오두막은 아닐터 .....

20대 초반의 내가 어느듯 환갑이 지났으니 세월의 무상함만 아련하다

이 집은 봉명산방(鳳鳴山房)으로 2007년 작고한 변규화 선생이 1978년 집을 짓고 입주한 것으로

산방이름은 소설가 정비석이 작명해 주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 돌탑들은

변규화 선생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고를때 나온 돌들로 쌓아 올린 소망탑들이다

샘터가 있고,  뒤편 바위에 소망탑이라고 암각한 글자가 보인다

 

 

 

불일폭포로 가는 벼랑길

 

 

옛날엔 이런 안전시설 없이 위험한 바위벼랑길을 겁없이 더듬어 내려갔던 기억이 새롭다



 

 

폭포 전망대

지금은 더 이상 폭포 아래로 내려갈수가 없게 되어있다

 

 

40년만에 다시 찾은 불일폭포

옛날에는 저 폭포 바로 밑에까지 내려가서 온몸으로 세찬 폭포를 맞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함께했던 그 친구들은 지금은 모두 소식이 끊겨 생사조차 모르고있는 현실이 슬프게 한다

 

 

 

이 불일폭포 협곡 아래에 비경의 '옥천대'가 있다고 하는데

지리산 도사 최화수 님의 저서 '지리산365일'에 의하면 옥천대는 불일폭포 가는 길에서는 보이지를 않고

불일폭포 아래 협곡으로 내려가서 계곡을 따라 500m 가량 더 돌아가야 만날 수 있지만

누구나 그곳에 가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옥천대로 가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들고 위험한데

무엇보다도 길이 없어 그곳은 아주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나 같다고 한다

그래서 불일폭포를 찾은 그 수많은 사람들도 대부분이 '옥천대'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옥천대'를 내 친구인 여포 여상수가

20014월에 불일평전 봉명산방의 변규화 선생의 안내로 둘이서 답사를 하였다고 하니 가히 기록에 남을 일이다

여포 여상수의 산행기에 의하면

변규화 선생을 따라 거의 수직 낭떠러지를 기다시피하여 겨우 협곡 바닥에 내려서니

불일폭포 아래 20미터 높이의 또 다른 폭포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의 큰 용소 바깥에 또 하나의 용소가 겹으로 이루어진 '겹용소'가 있어

사람의 접근을 어렵게 하였고

안쪽 용소 깊은 곳에 가야산까지 통하는 터널이 있어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두 산을 오가는 길이었다고 하는데

그 터널을 찾아보려고 시도했지만 위낙 깊고 안쪽 용소로의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터널 찾기는 실패하였지만 계곡을 따라 물과 물을 건너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고,

집채만큼 큰 바위로 기어 오르내리고 하면서 한동안 내려가니

사방에 바위덩이뿐인 곳에 키가 큰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곳에

집채 같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옥천대'였다고 한다

바위 밑으로 토굴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구들목도 만들어져 있었고 사람이 기거한 흔적이 뚜렷하였는데

들어 갈 때는 기다시피 하지만 안에는 예상외로 일어설 수도 있고 이리저리 팔을 휘두를 수도 있을 만큼 넓었다고 한다

안내한 변규화 선생도 그때 자기도 10년만에 옥천대에 다시 왔다고 했다는데

그만큼 협곡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거부한 것이었고

다만 스님들이 가끔 몇일 간 토굴에서 기도를 하곤 했다고 한다

(이상 여상수 산행기에서 인용)

 

 

 

 

 

불일암은 오래된 천년고찰이었는데 1980년 화재로 인하여 완전 소실되어 없어졌으나
2005년 다시 신축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이 폭포 입구에 있는 이 암자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고려 21대 왕 희종이 지눌의 덕망과 불심에 감동하여 '불일보조'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시호를 따라 암자 이름을 '불일암'으로 하였고, 폭포 이름도 '불일폭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일암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조망
불일암에서 바라보이는 광양의 백운삼봉은 그야말로 선계를 보는 듯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불일암을 찾는다고 하는 곳이다

 

 

 

다시 내려온 쌍계사 전경

 

 

대한불교 조계종의 13교구 본산이자 여섯번째의 총림인 쌍계사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원, 승려의 복지시설(요양원)인 간병실 등의

5원 체제를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5개 총림이 있었는데

2012년 4월에 부산의 범어사와 대구의 동화사와 함께 쌍계사도 총림으로 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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